1998. 8. 『조선유학의 자연철학』, 예문서원


조선 유학에서의 귀신(鬼神) 개념


    김    현


1. 머리말

2. 조선 초기 남효온(南孝溫)의 귀신론

  1) 귀신의 개념

  2) 귀신과 제사(祭祀)의 문제

  3) 귀신과 화복(禍福)의 문제

  4) 여귀(厲鬼)의 존재

  5) 귀신과 무격(巫覡)․복서(卜筮)․풍수(風水)의 문제

3. 조선 중기 성리학자들의 귀신론

  1) 서경덕(徐敬德)의 귀신론

  2) 이황(李滉)의 귀신론

  3) 이이(李珥)의 귀신론

4. 조선 후기 낙학파(洛學波)의 귀신론

  1) 김원행(金元行)의 귀신론

  2) 송명흠(宋明欽)의 귀신론

  3) 임성주(任聖周)의 귀신론

  4) 전우(田愚)의 귀신론

5.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귀신론

  1) 정약용의 귀신 개념

  2) 정약용 귀신론의 의미

6. 맺음말



1. 머리말


  유학의 이론 분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그 하나는 우주의 근원적인 존재와  만물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는 본체론(本體論)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 심성(心性)의 본질과 정신작용 그리고 도덕 실천의 가능성 등을 다루는 인성론(人性論)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에서 자연 철학이라고 하면 그 중 전자를 의미하는데, 그 자연 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이미 존재하는 현상계 안의 사물들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의 시원적 존재에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현상 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이른바 자연 운행의 전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유학, 특히 성리학의 귀신론(鬼神論)은 본체계와 현상계 사이를 오고 가는 그 중간적 존재에 주목하는 이론이며, 그 점에서 자연 철학의 일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만물이 오고 가는 다양한 과정 중에서도 가장 깊은 관심이 모아진 대상이 바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귀신론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보면 귀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본체론과 인성론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이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는 귀신에 대한 논의의 위상이 그렇듯 높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다룰 때 요구된 학문적인 성찰의 엄밀성도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귀신의 문제를 주변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고 간단히 다룬 것이 아니라 본체론․인성론의 다른 이론들에 맞추어 볼 때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는 이론적 정합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인지의 영역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관한 일로 여겨져 왔던 귀신의 문제를 그처럼 꽉 짜여진 합리적 이론의 틀 속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실제로 그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가 귀신론이라고 하는 이름에 제이론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귀신의 문제가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의 범위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한 공은 일차로 성리학 이론을 만들어낸 중국의 철학자들, 장재(張載), 정이(程頤), 주희(朱熹)와 같은 사람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중국 성리학의 귀신론이 조선 사회에 소개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당장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성리학의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자들의 치열한 성찰이 가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의심할 바 없는 확고한 관념을 형성하여 우리의 인생관과 자연관을 이끄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의 본론에서 살펴 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귀신론은 바로 전통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학문적 노력의 산물들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조선시대 주요 유학자들의 귀신론을 살펴봄으로써 본체와 현상 사이의 문제에 대한 그들의 이론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 갔으며, 궁극적으로 도달한 결론은 무엇이었는지를 밝혀 보고자 한다.



2. 조선 초기 남효온(南孝溫)의 귀신론


  조선 유학의 귀신 개념을 알아보기 위한 우리의 논의는 15세기의 성리학자 남효온(南孝溫)1)의 귀신론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그는 조선 성리학이 그 이론 정립의 정점을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었던 조선 초기의 학자이면서 귀신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포괄적인 저작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효온의 귀신론은 살펴봄으로써 조선의 학자들이 다른 성리학 이론과 함께 수용한 합리적인 귀신 이론의 대체적인 규모를 살펴 볼 수 있다. 남효온 이후 다른 학자들에 의해 세부적인 이론들이 지속적으로 심화되어 갔지만, 그 세세한 논의들은 모두 그가 제시한 바와 같은 포괄적인 귀신론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귀신의 개념


  남효온은 귀신의 뜻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귀(鬼)란 것은 돌아간다[歸]는 뜻이요, 신(神)이란 것은 펼쳐진다[伸]는 뜻이다. 그렇다면 천지 사이에 와서 펼쳐지는 것은 모두 신이요, 돌아가는 것은 모두 귀라고 할 수 있다.2)


  남효온의 이같은 설명은 성리학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언급하는 귀신(鬼神)의 어의(語義)로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문자 풀이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러한 문자 풀이에서 알 수 있는 귀신의 개념은 그것이 신묘한 힘을 발휘하는 초자연적 실체가 아니라, 자연 속의 여러 사물과 현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그 중간 과정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연 속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정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되, 그 변화의 근저에는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변화의 원리가 깃들어 있으며 그것이 자연을 본받는 인사의 원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유학 사상의 기본적 사고인데, 귀신 개념도 명백히 그러한 자연관 안에서 정립된 것이다.  귀신은 끝없이 변화하는 자연 현상 속에서, 자연이 그 스스로 변화해 가는 주체적인 능력을 보는 측면에서 파악된 것임을 남효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늘에 대해서 말하자면 밝은 것이 무수히 많이 있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거기에 매이고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변화하는 것은 천신(天神)이라 하며,  무수한 흙덩이를 모아 모든 산과 물을 거기에 싣고 동물과 식물을 기르는 것을 지신(地神)이라 하며, 천지중화(天地中和)의 덕을 얻어 일월(日月)과 더불어 차고 기우러짐을 같이 하고, 사시(四時)와 더불어 길흉을 같이 하는 것을 인신(人神)이라 한다.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면서 초목을 낳으며 만물을 비장하여 인간에게 재물을 일으키는 것은 산신(山神)이라 하고, 흐르면서 가득 차서 온갖 물고기를 낳고 보배로운 것이 세상에 유통되도록 하는 것을 수신(水神)이라 하고,  오행으로 하여금 상생상극(相生相克)하게 하고 오곡(五穀)을 길러 사람들의 목숨을 유지하게 하는 것을 곡신(穀神)이라 하고, 꽃이 피고 자라나게 하는 것을 초목(草木)의 신이라고 하고, 한 집안의 주인이 되는 것을 오사(五祀)의 신이라고 한다. 거기서 드러나는 것은 기요 그 은미한 것은 이(理)니 이를 총괄하여 귀신이라 말하는 것이다.3)


  남효온의 이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귀신 아닌 것이 없게 된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체 현상, 사계절의 변화, 땅에서 일어나는 지형의 생성 변화, 동식물의 생장,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인사의 모든 것이 다 귀신이라는 이야기이다. 사실상 성리학에서 말하는 귀신은 자연의 어느 일부를 제한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어느 특정한 각도에서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정이(程頤)가 언급한 바, “형체로 말하면 천(天)이요, 주재로 말하면 제(帝)요, 공용으로 말하면 귀신(鬼神)이요, 묘용으로 말하면 신(神)이요, 성정으로 말하면 건(乾)이다”4)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천지 자연 전체를 그 변화의 운행의 측면에서 지칭하는 것이 바로 이 귀신의 성리학적 어의인 것이다. 단, 이 가운데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에 깃들인  변화 운행의 작용 능력을 통칭한 것이라고 한다면, 귀신(鬼神)이라는 말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변화를 지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효온은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듯 자연의 모든 운행 현상에 관계된 것임을 설명하고 나서, 그러한 모든 현상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인 요소는 이(理)와 기(氣)인데, 귀신이라는 것은 그 두 가지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귀신(鬼神)과 이․기(理氣)의 관계. 이것은 남효온 이후 조선 성리학자들의 지속적인 토구의 대상이 된 문제로서 갖가지 심화된 이론을 낮은 주제이지만, 그 모든 논의는 남효온이 지적한 ‘귀신은 드러나는 기와 은미한 이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귀신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이나 기와 같이 근원적 존재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와 기가 함께 묶여져서 자연 속에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일반적인 사물이나 현상들은 자연 속에 ‘있는[有]’ 모습을 보여 주는 데 반하여, 귀신은 ‘있는[有]’ 것과 ‘없는[無]’ 것의 사이를 오고가는 것을 지칭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 귀신과 제사(祭祀)의 문제


  조선 성리학자들이 귀신의 문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단지 그것이 자연의 ‘공용(功用)’이라는 자연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며,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가 바로 그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다른 자연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있어서도 귀신은 그 오고 가는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남효온의 설명을 들어본다.


문: “사람은 태어날 때 무극지진(無極之眞)과 이오지정(二五之情)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 함께 조화(造化)와 공용(功用)의 테두리 안에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돌아가는가?”

답: “체백(體魄)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기(魂氣)는 못하는 데가 없다.”

문: “간다고 하면, 형상이 있는 것인가?”

답: “귀신은 형상이 없다.”

문: “소리는 있는가?”

답: “귀신은 소리도 없다.”

문: “마음은 있는가?”

답: “귀신은 마음도 없다.”

문: “형상도, 소리도, 마음도 없다면, 무엇이 제사를 흠향하는가?”

답: “기(氣)가 흠향한다.”

문: “기가 흠향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답: “내 마음을 증험해서 안다.”5)


  혹자(或者)의 첫 질문에 언급된 대로, 인간은 (다른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이(理)와 기(氣)가 함께 모여 현상 속의 사물의 하나로 태어난다. 그가 부여된 명(命)을 마치게 되면, 그의 몸체를 지탱하던 기는 흩어져서 소멸하는데, 음(陰)의 기로 이루어진 체백(體魄)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흩어지고, 양(陽)의 기인 혼기(魂氣)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떠돌다가 소멸한다. 이른바 양혼․음백(陽魂陰魄)의 이론으로서 유교의 전통적인 사생관을 답습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답에서 제기된 물음은 인간이 사후에 그렇게 소멸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제사(祭祀)를 흠향하느냐 하는 것이다. 남효온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 흩어진 기가 제사를 흠향할 수 있으며, 제사를 받드는 자손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그 증험을 남긴다고 이야기한다. 흩어져 버린 기가 여전히 제사를 흠향할 수 있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기(氣)가 모여서 사람이 되고, 흩어져서 귀신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똑같은 이치이지만, 조상과 자손의 사이에는 특히 들이쉬고 내쉬는 기가 몸에 통하는 것이 있어서 이것과 저것 사이의 구별이 없다. 자손에게 느낌이 있으면 신명(神明)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밝고 밝아서 의심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사념이 없게 하고 안색을 바로 하여 부모를 다시 보는 듯 정성을 다하면 마음 속에 깊고 넓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형상이 없던 것도 다시 나타나게 될 수 있고, 소리가 없던 것도 있게 될 수 있고, 마음이 없던 것도 있게 될 수 있어, 좌우(左右)에 환히 빛나고 상하(上下)에 가득 충만하여 초목의 꽃이 피듯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6)


  여기서 남효온은 조상과 자손의 기의 동질성을 이유로 들어 죽은 자가 제사 지내는 이와 감통할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 죽은 자의 기가 천지 사방에 흩어져 있다 하더라도 핏줄을 같이 하는 자손의 기와 동질의 것이기 때문에 양자의 구별이 없어서 서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진정으로 정성을 모아 돌아가신 이를 보기를 염원하면 그것이 흩어진 조상의 기에 영향을 미쳐 없어졌던 형상과 소리, 마음을 다시 존재케 해서 제사를 흠향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귀신의 강림은 다시 동질의 기로 이루어진 자손의 마음을 움직여 느낌을 갖게 할 수 있으니, 이로써 조상과 자손에 제사를 통해 서로 감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귀신의 모습이 형상화되는 것은 물론 자손이 정성을 모으는 제사 때에 한 해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귀신과 화복(禍福)의 문제


  조상의 넋을 지성으로 받들면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성리학 교설에서의 인정 여부를 떠나 이미 우리 전통시대에 널리 수용된 사고이다.  성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실제로 취한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점에 대해 남효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 “귀신에게 제사하면 복(福)을 얻는다는데 그럴 이치가 있는가?”

답: “그렇다.”

문: “그대는 이미 귀신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마음도 없다고 했는데, 무엇이 화(禍)와 복(福)을 주는가?”

답: “귀신이 흠향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의 화복이 저절로 아득한 속에서 더 묵묵히 정해지는 것이지, 귀신이 누구에게 화를 주고 누구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적게 심으면 적게 수확하고, 많이 심으면 많이 수확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스스로 화와 복을 취하는 것이지, 귀신이 사람에게 화와 복이 미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7)


  이 문답을 통해 보면 그가 제사(祭祀)와 화복(禍福)이 유관함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미신(迷信)의 혐의가 연루되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제사를 잘 지내면 자손이 복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몸과 마음을 진실되게 한 데서 온 자업자득의 결과일 뿐이요, 귀신이 사사로운 정으로 복을 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남효온은 이처럼 귀신과 화복의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이미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 온 이적성(異蹟性)의 고사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함을 부연하였다.


신하가 임금을 위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고, 아우가 형을 위하고, 친구가 친구를 위하는 절박한 마음이 일호의 사사로움이나 거짓이 없어서 천리(天理)의 바름에 순수하게 부합하면, 여기서 느끼어 저기에 반응하는 이치가 그렇게 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수가 있다. 논의가 이런 데까지 이르면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렵다. 주공(周公)이 금등(金藤)에 빌고, 검루(黔婁)가 북신(北辰)에 기도한 일, 왕상(王祥)이 얼음 깨고 잉어를 얻은 일, 맹종(孟宗)이 겨울에 대밭에서 울어 죽순을 나게 한 일 등이 있으니, 어찌 이치가 없다면 그럴 수 있겠는가?8)


  그가 귀신과 화복의 관계에 대해 아무리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하려 했다 해도 오랫동안 실재의 사실로, 더군다나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사례로 인정되어 이야기들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귀신에게 빌어 이적(異蹟)을 일으킬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호의 거짓도 없이 천리의 정당성에 부합하는 기원을 하였을 경우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지 사사로운 욕구를 그같은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그와 같은 이적의 힘은 기적(氣的) 세계에 머무는 귀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운행의 진실된 이치인 천리(天理)에서 유래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귀신과 화복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그의 의도가 결국은 귀신의 특별한 능력을 인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도덕 원리의 존재를 깨닫고 그것에 순응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4) 여귀(厲鬼)의 존재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귀신 개념은 ‘기(氣)의 양능(良能)․공용(功用)’으로 자연의 정상적인 이치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귀신’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 온 것 가운데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요사(妖邪)’와 ‘여귀(厲鬼)’를 말함이다.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것들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가? 장재(張載)가 “귀신은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 하고 정이(程頤)가 “공용(功用)을 귀신이라 한다.”고 했을 때, 요사와 여귀의 개념까지를 포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능’이나 ‘공용’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것, 바른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희와 그 제자들이 귀신에 대해 논의한 내용들을 담은 주자어류 제2장에는 벌써 그 본래의 귀신 개념 이외에도 요사와 여귀에 관한 많은 문답이 등장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주희가 그러한 비정상적 현상을 무조건 일축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설명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한 노력이 필요했을까? 요사와 여귀를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분명히 실재하는 것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면, 자연과 인사(人事) 모두를 남김없이 수용하는 포괄적인 철학의 정립을 목표로 했던 성리학자들이 그 문제를 자기 학문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효온 역시 주희의 그같은 입장을 받아들여 요사와 여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남효온은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고사(故事)에 나오는 이적성의 이야기를 비평하는 것에서부터 출발시켰다.


문: “양소(良霄)가 죽어 정나라를 해치고, 팽생(彭生)이 죽어서 제양공(齊襄公)을 해치고, 여의(如意)가 죽어서 여후(呂后)를 해치고, 관부(灌夫)가 죽어서 전분을 해쳤다고 하는데,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모두 속이는 것인가?”

답: “이것은 속이는 말이 아니라 도리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도리이다. 무릇 사람은 이 이(理)를 얻어서 태어났으니, 이 이(理)에 순응하여 삶을 마치면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갈 따름이다. 어찌 그 사이에서 한낱 마음이 가슴 속에 머물며 위세와 복을 베풀 수 있겠는가? 만약 얻은 바의 이치를 다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칼이나 활에 맞아 죽게 되면, 마음이 엉겨서 흩어지지 아니하고, 분이 맺혀서 흘러나오지 못하여, 어둡고 더러운 기운이 사람을 덮쳐 죽이는 이치가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귀신의 변칙이요, 떳떳한 이치는 아니다.”9)


  생명체의 탄생은 그것의 이(理)와 기(氣)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죽음과 더불어 그가 생시에 가졌던 구체적인 형상은 분해되고 소멸되어 간다. 남효온은 이같은 논리로 사후에까지 불멸하는 정신적 존재의 실재를 일차 부정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특별한 경험이나 사서(史書)의 기록에 의하면 죽은 후에 귀신이 되어 남에게 화(禍)를 끼치는 사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와 같은 일은 비록 정상적인 생사(生死)의 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예외적인 도리, 즉 변칙에 의해 생겨난 현상이다. 모든 사람의 태어남 순수한 이치를 얻어 무(無)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이치대로 삶을 마치면 다시 무로 돌아가되, 갑작스럽게 비명에 쓰러지게 되면 혼백이 순조롭게 흩어지지 못하고 죽는 순간의 마음 그 상태대로 머물러 요사한 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수많은 원혼이 죽어간 전쟁터에서 음산한 밤에 울음소리가 진동하고 도깨비불이 번쩍이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역시 정당하게 생을 마감하지 못한 사람들의 엉킨 혼기가 그 주위에서 떠돌다가 비를 만나고, 밤을 만나게 되면 음기(陰氣)와 음기(陰氣)가 부딪혀 소리를 내기도 하고 형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사와 여귀의 실체이다. 남효온은 죽은 사람이 여귀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그 원인은 비정상적인 죽음에 있다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명에 죽은 사람이 모두 여귀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 겉보기에 정상적으로 죽은 것 같아도 여귀가 되는 경우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것은 모두 그 사람의 평소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라고 하였다. 즉 자로(子路)나 굴원(屈原)은 비명에 갔지만 생시에 그들의 마음에 사심(邪心)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여귀로 남지 않은 것이요, 한무제(漢武帝)의 첩 이부인(李夫人)과 수양제(隋煬帝)의 방사(方士) 진숙보(陳叔寶)는 명(命)을 마치고 죽었어도 평소의 마음가짐이 사특하였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한동안 여귀로 떠돌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여귀들은 그것은 장구히 존재하는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기가 엉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소멸해 가는 기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흩어지고 없어질  뿐이다.10)

  죽은 자의 여귀는 그렇게 생겨나서 그렇게 소멸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지만 여귀 가운데에는 사람이 죽어서 된 것 뿐 아니라, 깊은 물 속이나 산 속에 출몰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해를 입히기도 하는 이른 바 물귀신 산귀신도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단지 허황된 속임수인가? 남효온은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귀신도 속임수도 아니다. ..... 그것은 천지간의 사특(邪慝)한 기운이니, 한유(韓愈)가 말한 물괴(物怪)가 바로 이것이다.  ..... 무릇 사물은 오래되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화하는 것이 이치이다. .... 천지가 생긴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기를 쓴 것이 많고, 그래서 그 가운데 사특한 기운이 생겨나는 것도 역시 이치이다.11)


  산도깨비나 물귀신은 실은 여귀도 아니며, 오랜 자연 현상 가운데 저절로 조악한 기가 생겨나서 낮선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마치 시냇물이 고요히 흐르다가도 말류에 이르러 교묘한 지형을 만나게 되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용동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기에 의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변칙적인 자연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5) 귀신과 무격(巫覡)․복서(卜筮)․풍수(風水)의 문제


   무당에게 빌어 귀신의 도움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가? 귀신에게 점을 청하여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는가? 풍수에 의거하여 집터나 산소 자리를 잡는 것은 그 집안의 화복과 관계가 있는 일인가?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민간의 의식을 떠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성리학자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남효온의 말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문: “무격(巫覡)의 일은 다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답: “귀신과 사람은 한 몸이니, 무당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 무함(巫咸)과 같다면, 어찌 신명과 감통하지 아니하겠는가? .... (그러나) 지금의 무당은 그릇된 방법으로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천자(天子)가 아니면 제사할 수 없는데 무당은 칠성(七星)의 신을 세우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은 제후(諸侯)가 아니면 제사할 수 없는데, 무당은 산천(山川)의 신을 끌어들이고, 무릇 사람의 병은 모두 원기(元氣)가 고르지 못한 데서 기인되는 것인데 무당은 귀신이 들어서 그런다고 이르며 억지로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쓸데없이 비용을 허비하게 한다.”12)


문: “귀신에게 점을 청하는 것이 이치가 있는가”

답: “있다. 귀신은 바로 도(道)이니, 그 이치에 의하여 청하면 신(神)이 반드시 점대[筮]를 통해 알려 주지만, 하고자 하는 일이 이치가 아니고 청하는 것이 진실되지 않으면 신이 간혹 마땅치 않게 여겨 답해 주지 않는다.”13)


어느 산이 어느 모퉁이를 가려 주면 바람 기운이 화평하고, 어느 물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면 물 기운이 사납다하여, 풍수의 화평하고 사나운 것으로 인생의 편안하고 편치 않음을 점치는 것은 이치에 가깝다. 하지만, 만약 어느 귀신이 어느 방위를 지키고 어느 별이 어느 땅에 다다랐으니, 물이 어느 귀신을 범하면 흉하고, 물이 어느 별에 들어가면 길하며, 청룡(靑龍)이 달아나면 흉하고, 백호(白虎)가 오면 길하다 한다면, 사람을 속임이 심한 것이다. 군자는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긴다.14)

 

  이상에서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남효온은 무격(巫覡), 복서(卜筮), 풍수(風水) 등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미 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그러한 의식과 관습이 윤리성과 합리성에 부합하도록 유도하려는 의식을 보이고 있다. 그는 무격이라 할지라도 진실한 기도를 올릴 수 있으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대의 무격들은 기도나 대상을 찾는 데서부터 참람되게 이치를 벗어나기 때문에 취할 것이 없고 특히 사람이 병드는 것은 그 자신의 기가 쇠약하여졌기 때문이지 귀신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의 정성에 의해 사라졌던 기들이 다시 모이고 그 귀신이 후손과 감통하게 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처럼 특정한 혈연 관계에 있는 조상의 귀신이 아니라, 천지 또는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천하와 나라를 다스릴 책임을 명으로 받은 천자와 제후만이 그 이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의 정치 질서를 종교적 자연관과 연결지었던 고대 중국의 유습을 계승한 사고에 불과하지만, 그 사상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리학자에게는 ‘올바른 귀신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그것이 바로 합리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점을 치는 것 역시, <<주역(周易>>이라고 하는 복서(卜書)에 심대한 의미를 부여해 온 유학자들이 그 의미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 자세가 윤리적이어야 하며 바라는 것이 이치에 맞아야 한다는 전제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지 못한 무격은 점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귀신의 영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남효온의 주장이다.

  풍수에 대한 남효온의 주장은 유교적 합리성의 추구에 더욱 든든하게 입각해 있다. 지리적 환경이 화평한 곳에서는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생활도 평안하게 되는 것이 당연할 뿐, 거기에 쓸 데 없이 귀신을 끌어들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살피고 보면, 남효온은 그와 같은 무격, 복서, 풍수의 문제를 귀신과 결부시키는 것에 모두 반대하였음을 알게 된다. 귀신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인간과 귀신이 감통하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바른 길[正道]을 벗어나는 기원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남효온의 귀신론에서는 이밖에도 세상 사람들이 귀신의 조화로 믿는 많은 일들이 실은 초자연적인 힘과는 무관한 것이요, 합리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 인간의 노력으로써 풀어가야 할 것임을 밝힌 여러 가지 경우를 들어 역설하고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다.


문: “지금 역병에 걸린 집에서 서로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것을 사람들은 귀신으로 생각하는데 진실로 그러한가?”

답: “그것은 귀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운행하는 기운 때문에 그런 것이다. .... 무릇 사람의 기가 아래에서 화평하면 천기(天氣)가 위에서 화평하고, 사람의 기가 아래서 뒤틀리면 천도(天道)가 위에서 응하는 것이다.”15)


문: “우리나라의 평안도 황해도에는 해수병(咳嗽病)이 많고, 충청도 전라도는 각기병(脚氣病)이 많다. 사람들이 귀신이 들어서 그런다 해서 빌고 있는데 진실로 그러한가”

답: “이는 귀신이 아니라 땅이 일으킨 병이다. .... 풍기(風氣)는 무심한 것이지만 이상한 물이나 흙을 만다면 독기를 만들어내는데, 사람이 마음으로 몸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에 닿아 병을 얻기도 하고, 혹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16)


문: “사람들이 학질병을 보고 염제(炎帝)의 아들이 들어서 그런다고 하는데 이는 귀신인가?”

답: “이것은 귀신이 아니다. 추위와 더위가 고르지 못해 오장이 상하게 되면 이 병이 생긴다.”

문: “그 병은 오고 가는데 일정한 도수(度數)가 있고, 방사(方士)가 위협하면 물러가고, 피하면 면할 수 있다. 고역사(高力士)와 두자미(杜子美) 이래 모두 그렇다고 하는데, 그대만 홀로 귀신이 아니라고 하는가?”

답: “마음은 바로 몸의 주인이다. .... 방사의 술법을 믿어 마음과 기를 편안하게 했기 때문에 병이 저절로 물러간 것일 뿐이다.”17)


  남효온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의학 상식에 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불가사의한 귀신의 장난으로 이해되어 오던 여러가지 질병에 대한 의문을 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서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이러한 질병들은 “의원의 약처방으로 치료하라”는 것이다.

  남효온이 수천 자의 문자를 써서 갖가지 미신적 사고를 열거하고 그것들은 소위 “귀신”의 일이 아님을 밝힌 것은 귀신이라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을 공포 속에 있게 하는 “난신․괴력(亂神怪力)”이 아니라, 올바른 이치에 따라 자연을 운행케 하는 자연의 공용임을 밝히고자 한 데 그 뜻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통속적인 귀신 개념을 불식시키고 이른바 합리적인 귀신 개념을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조선 중기 성리학자들의 귀신론


  남효온이 자세하게 진설한 귀신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들은 한 마디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었던 귀신이라고 존재를 유교적인 합리주의의 세계로 끌어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유교적인 자연관과 인생관을 일반 사람들의 의식 속에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한 번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의 제문 제가 보다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지는 16세기 이후에는 그와 같은 기담(奇談)은 더 이상 귀신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성리학적 귀신 개념의 원의인 ‘자연의 공용(功用)’을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문제, 인류지대사인 제사와 관련하여 조고(祖考)의 신명(神明)과 후손의 관계를 설명하는 문제가 귀신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심화되어 간 조선 중기의 귀신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서경덕(徐敬德)의 귀신론


  이․기(理氣)의 개념 및 그 양자의 관계에 대해 지극히 정미한 이론을 발전시켜 간 조선 성리학사에서 서경덕(徐敬德)18)은 그 저작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독특함으로 특별히 주목을 받아 온 인물이다. 그 독특함이란 주리적(主理的) 성격이 강한 정주학(程朱學) 위주의 풍토 속에서 장재(張載) 류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전개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氣)를 위주로 설명되는 귀신론에서도 독자적인 이론을 갖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서경덕의 귀신론의 특징은 기의 영원성에 기초하여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 사이의 끊이지 않는 연속성을 강조한 데서 찾아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자(程子)는 ‘죽음과 삶 및 사람과 귀신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로서 충분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죽음과 삶 및 사람과 귀신은 다만 기(氣)가 모인 것과 흩어진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이고 흩어짐’의 차이만 있지 ‘있고 없음’의 차이가 없는 것은 기의 본체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19)


  사람이 죽으면 그 기가 흩어지고, 그 흩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이 귀신임을 지적하는 것은 서경덕의 생각이나 성리학의 일반론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서경덕은 그  삶과 죽음 양자의 차이는 어디까지나 모이고 흩어짐의 차이일 뿐 결과 있고 없음의 차이는 아님을 강조한다. 성리학의 일반론은 사후에 귀신의 기(氣)가 흩어져 결국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인데, 서경덕이 유무(有無)의 차이가 없다고 한 것은 개별적인 귀신의 기가 끝내 완전히 흩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개체의 기는 완전히 흩어지되 하되 그 기의 원질은 소멸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 (오늘날의 물리적인 사고로 표현하자면 최소 단위의 입자만 남을 때까지 분해되는 것)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서경덕의 답변을 명확히 끄집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가 남긴 글은 그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함께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기(氣)는 맑고 한결같고 깨끗하고 텅 비어있으며, 한없는 허공 속에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이 크게 모인 것은 천지(天地)가 되었고, 그것이 작게 모인 것은 만물이 되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형세에는 미약한 것과 뚜렷한 것, 오래 가는 것과 빨리 변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크고 작은 것이 태허(太虛)에 모이고 흩어지는 데에는 그 크고 작음 따라 차이가 있다. 하지만 비록 한 포기 풀이나 한 그루 나무 같은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기는 끝내 흩어져 버리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의 정신(精神) 지각(知覺)과 같이 그 모인 것이 크고 또 오랜 것에 있어서랴!20)


  서경덕은 이 글에서 한 포기 풀이나 한 그루 나무 같이 미소한 사물의 기(氣)도 완전히 흩어지지 않으며, 더군다나 사람의 정신(精神)․지각(知覺)과 같이 크고 오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앞 문장에서 기는 모이고 흩어진다고 해 놓고서 다시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이는 무슨 말인가?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흩어지는 과정에 들어가서도 그 모여진 상태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하는 말이 되지만, 사실상 그 견해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성리학에서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하는 것과 똑같은 공박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문단의 마지막 귀절에서 쓴 ‘흩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기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가? 그런 뜻이라면 그는 ‘산(散)’이란 말 대신에 ‘무(無)’라는 표현을 썼어야 했을 것이다. 그 스스로 이미 ‘취산(聚散)’과 ‘유무(有無)’를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서경덕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 문장을 보기로 하자.


몸과 넋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 얼핏 완전히 없어져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 기(氣)가 맑고 한결같고 깨끗하고 텅비어 있는 것[湛一淸虛]은 태허(太虛)가 움직여 양(陽)을 낳고 머물러 음(陰)을 낳는 시초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것이 점점 모여서 지극히 넓고 두터운 데 이른 것이 천지(天地)요 인간(人間)이다. 사람이 흩어질 때는 형백(形魄)이 흩어질 따름이지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것이 모인 것은 끝내 흩어지지 아니한다. 태허(太虛)의 맑고 한결같은 데로 흩어져 보았자 똑같은 기(氣)인 것이다.21)


  여기서 서경덕은 기 중에서도 흩어지는 것과 흩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는 형백(形魄)이라고 하였고 후자는 담일청허(湛一淸虛)라고 하였다. 기에 취산(聚散)이 있는 것은 형백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기 때문이요, 기에 유무(有無)가 없는 것은 담일청허가 영원히 한결같기 때문이다. 형백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도 그 기의 담일청허한 본질은 영원히 이어지기 때문에 유무가 없다고 하였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기는 흩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결국 서경덕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한 것은 어떤 기의 모여진 형태가 장구하게 유지된다고 한 것도 아니요, 그 기의 기본 입자가 불멸한다는 뜻도 아니며, 기의 본질인 담일청허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경덕은 인간의 정신이나 지각은 바로 이 담일청허한 기의 본질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의 정신이나 지각도 그것이 의착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形氣(형기)이니 그 형기가 흩어지면 정신이나 지각의 현상적인 모습도 흩어질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에 간직된 담일청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을 바라보면 인간의 지각이나 정신도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경덕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 지각(知覺)의 모임과 흩어짐에는 다만 오래가거나 빨리 됨이 있을 뿐이다. 비록 가장 빨리 흩어지는 것으로는 하루나 한 달이 걸리는 것들이 있고 그것은 물건 가운데에서도 미소한 것들이지만, 그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맑고 한결같고 깨끗하고 텅 빈 것은 이미 시작도 없으려니와 그 끝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기(理氣)가 지극히 오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22)


  서경덕은 기일원론자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일원론적인 기 개념 속에는 실은 정주학의 이․기(理氣) 개념에 해당하는 이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을 성리학의 원론에서 각각 이(理)와 기(氣)로 지칭하였지만 서경덕은 그것을 동일한 하나의 기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모습 즉 담일청허(湛一淸虛)한 본질과 취산(聚散)하는 형질로 수용한 것이다.

  서경덕의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 쓰여진 문장들은 인간과 사물을 생멸을 기의 취산 과정으로 설명하지 때문에 얼핏 유물론적인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 글 전체의 의미를 새기게 되면 마치 유심론자의 영혼 불멸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경덕이 그 글을 쓴 시점이 그의 병세가 위중할 때라서 일종의 종교적인 염원을 담겼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경덕의 기 개념 자체가 물질성과 정신성을 함께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서경덕의 제시한 귀신의 존재란 그 형체는 계속 흩어져 가도 그 기의 담일청허는 영원히 남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체를 이루는 기에는 취산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이 둘[二]이지만, 그 모이고 흩어짐을 상관없이 그 기의 담일청허는 한결같으므로 삶과 죽음, 인간과 귀신은 하나[一]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비록 세 선생의 문학의 학자들이었다 할지라도 그 궁극처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찌꺼기들만 주워 모아 학설을 만들고 말았다. .... 학자들이 진실로 이러한 경지에까지 공부를 하게 된다면 비로소 수많은 성인들이 다 전해 주지 않은 미묘한 뜻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모든 성인이 다 전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중간에 잃어버리지 말고 후학들에게 전해 중화와 변방에 두루 펼치게 하면 온 세상이 동방에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등의 말로 자신의 학설이 전인미답의 오묘한 경지에 도달한 것임을 강조하였다.23) 그가 단지 물질적인 기의 영속성만을 보았다면 그와 같이 과장된 자찬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그는 정호(程顥), 장재(張載), 주희(朱熹)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했던 참 뜻, 즉 ‘변화하는 것 속에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엄존한다’고 하는, 성리학의 이른바 ‘이기불상리지묘(理氣不相離之妙)’를 자신의 이론이 가장 잘 소화해 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고 믿어진다. 비록 서경덕의 일원론(一元論)이 후학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주장한 이․기(理氣)가 혼융(渾融)한 묘처는 이기이원론자(理氣二元論者)들에게 있어서도 반드시 체현하고 설명해야 할 과제로 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이황(李滉)의 귀신론


  조선 성리학의 황금기를 이룩하고 그 학술적, 도덕적 영향력을 후대에까지 길이 미친 이황(李滉)24)의 귀신론은 그의 다른 성리설과 마찬가지로 이와 기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이원론적 입장에서 서 있으며, 이 점에서 서경덕의 귀신론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든 학술적 논의에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지극히 신중하였던 이황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섣불리 있다 없다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죽음과 문제도 삶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이치 속에 있는 것인 한, 그 한 쪽만을 다루고 나머지 한 쪽은 버려 둘 수 없으므로 신중하게 논의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귀신의 문제를 다룬다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한 그가 사후에도 인간의 정신과 지각이 불멸한다고 하는 듯한 서경덕의 귀신론을 배척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황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자(程子)가 ‘도(道)에 오는 것이 있으면 나아가 탐구하라’라고 한 것의 뜻은  참으로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옳지 않고 없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 마땅히 있고 없는 사이에 붙여 두는 것이 좋겠다는 뜻일 뿐이다. 그런데 화담(花潭)은 참으로 있다고 하여서 그 물(物)이 모이면 사람과 사물이 되며, 흩어지면 허공에 있는데, 빨리 모이기도 하고 빨리 흩어지기도 하지만, 그 물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불가(佛家)의 윤회설(輪廻說)과 무엇이 다른가?25)


화담의 생각은 기(氣) 한 쪽에 치우쳤으니, 그의 설은 이(理)를 기(氣)로 인식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기를 가리켜 이라고 한 것도 있는데,  지금 여러분도 혹 그 설을 가까이 하여,  기가 고금에 걸쳐 항상 존재하고 소멸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여기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불가의 견해에 빠지게 된 것이니, 이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다.26)


  귀신의 일은 있고 없는 사이에 붙여 두는 것이 좋다는 말은 일면 논의의 회피 같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이 바로 공자 이래 유학에서의 귀신 문제에 대한 기본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황은 서경덕처럼 기의 불멸을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남효온이 했듯이 갖가지 기이한 현상에 대한 논의를 굳이 합리적인 이론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현실의 일처럼 명확히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인륜 도덕의 문제처럼 인간에게 절실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귀신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공자의 현실적인 태도를 따르려 했던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기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기본 입장이 다른 어떤 성리학자보다도 몰가치적이며 기계론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황이 서경덕의 학설에 대해, ‘이(理)를 기(氣)로 인식하였다’고 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理氣) 문제에 대한 이황의 기본 입장은 일단 그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요, 영원성 같은 것은 전적으로 이(理)에 부여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불멸의 이로부터 분리된 기라고 하는 것은 흩어져서 소멸될 일만 남은 것이다. 서경덕이 취산하는 기가 불멸하는 소이로 본 담일청허(湛一淸虛)는 실은 정결공활(淨潔空闊)한 이(理)의 영원성으로 보아야 할 것을 그가 잘못 알고 기에다 갖다 붙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이와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모를까, 그것을 기적인 세계에 두는 한 그렇게 세세히 논할 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황 자신의 귀신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전에 기(氣)가 흩어지면 바로 완전히 없어진다고 여겼는데, 요새 자세히 생각하니 이것도 또한 치우친 생각이어서 완전하지 못하다. 무릇 음(陰)과 양(陽)이 가고 오는 것은 점차로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와서 펼쳐지는 것과 돌아가 굽어지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펼쳐졌던 것이 다시 돌아갈 때는 그 펼쳐졌던 나머지가 한꺼번에 다 없어지지 않고 점차로 되는 것이다. 이미 굽어져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그 굽은 나머지가 갑자기 다 없어질 수 없다. 어찌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27)


  이황은 이 글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기가 흩어져서 즉시 무(無)로 돌아간다고 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가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생각을 고쳤다고 했지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아니며 그 기가 소멸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황이 생각한 귀신은 소멸의 과정에 있는 기이다. 마치 불 꺼진 화로 속에 더운 기운이 한 동안 남아 있다가 시간이 더 지나야 차갑게 식듯이, 여름날에 해가 이미 넘어간 뒤에도 더위가 남아 야음이 짙어진 때에 서늘해지듯이 사람의 기도 그가 죽은 후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28) 이황은 그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이 죽은 자를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라고 하였으니, 제사의 의의는 바로 그런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29) 물론 이와 같이 소멸해 가는 기로서의 귀신의 존재는 한시적이다. 이황은 그 점을 분명히 하였는데, 그 점에서 다른 성리학자들보다 더 철저한 면모를 보였다.


주자가 굽어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것이 있어서 귀신의 영(靈)이 된다고 한 것은  이미 굽어지기 시작한 귀신의 기(氣)가 다시 돌아와 영(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것은 이제 바야흐로 굽어지기 시작한 기에 영이 있으니, 그 영처(靈處)를 일컬어 굽는 가운데 펼쳐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일 뿐이다. 어찌 얼음과 물처럼 서로 왔다 갔다 하겠으며, 바퀴가 도는 것에 견주어 같이 보겠는가?30)


  일찍이 주희는 제사 지낼 때 귀신이 흠향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굽는 가운데 펼쳐짐이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 귀신의 기가 흩어지는 가운데에도 제사 때에는 일시적으로 그 기가 다시 모여 형상과 마음을 갖출 수 있기 때문에 자손이 올리는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하였다. 하지만 이황은 해석을 달리하여 ‘굽는 가운데 펼쳐짐’이란 귀신의 기가 소멸되기 시작한 처음에 아직 기의 영이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 이미 소멸되어 가는 기가 그 방향을 거꾸로 하여 다시 모이는 것일 이야기함은 아니라고 하였다. 돌아가는 기가 다시 모이는 일이 있다면 불가의 윤회설과 흡사한 이야기가 되는데, 전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귀신에 대한 이황의 논의를 살펴보면 기에 대한 그의 사고가 지극히 기계론적이어서 거기에 어떠한 영명한 능력이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론(氣論)이나 귀신론(鬼神論)에만 국한하여 서경덕과 이황을 비교한다면, 유기론자(唯氣論者)인 서경덕의 기 개념은 정신적인 색체가 농후한 반면, 주리론자(主理論者)의 이황의 기 개념은 철저히 물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은 기 하나를 가지고 물질․정신․도덕․변화․영원을 다 설명해야 했지만, 이황은 불변의 윤리와 이법을 설명할 이(理)라고 하는 세계를 따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기 개념은 지극히 제한된 세계에 머물러 있었고, 그에 따라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부여된 의미도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황은 이와 기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입장을 세우고 귀신을 주로 기적인 요소와 관련지어 설명했다. 그러나 성리학에서의 귀신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기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적인 측면이 있음도 중요한 논제로 부각되어 왔는데, 그 논의에 있어서는 이른바 <귀신장>이라 불리는 <<중용(中庸)>> 16장이 중심 텍스트가 되었다. 이황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했을까? <<중용>>의 귀신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가지고 질문한 문인의 편지를 받고 이황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주자(朱子)가 ‘귀신이란 것은 다만 기가 굽었다 펼쳐졌다 하는 것이다’라고 한 대목은 후씨(侯氏)의 설과 비교하여 차이가 없는데, <<혹문(或問)>>에서 후씨의 설을 배척한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자세히 주자가 문인들의 귀신의 덕(德)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을 살펴 보니, 이것은 귀신의 실제로 작용하는 이치를 말한 것이므로, 마치 사람의 덕을 말하는 데 있어서 사람은 사람대로 따로 한 물체가 되고 그 덕은 따로 덕이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후씨는 귀신을 형이하(形以下)의 한 물건으로 하고 그 갖춘 바의 이(理)를 가리켜 형이상(形以上)의 한 물건으로 하였기 때문에 귀신과 덕을 판연한 두 가지로 인식하여 본 것이요, 주자가 그르다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31)


  주희는 <<중용장구(中庸章句)>>와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 각각 귀신장을 해설하였는데, 이황은 그 양자 사이에 불일치한 면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즉 주희는 <<중용장구>>에서 귀신을 기의 굴신으로 설명하여 주기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귀신을 형이하의 존재로 보았다는 의미), <<중용혹문>>에서는 귀신을 형이하(形以下)의 존재라고 한 후씨(侯氏)의 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32) 이황은 주자가 왜 후씨의 설을 논박했는지 이해를 못하다가 결국에 가서는 주자가 후씨를 비판한 이유는 그가 귀신을 형이하의 존재로 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 그 자체와 귀신의 덕을 둘로 나누어 이해한 잘못 때문에 그러하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용문의 앞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황은 이 점을 분명하게 확신하지는 못하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황은 이․기(理氣)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귀신의 존재를 모였던 기가 소멸하기까지의 한시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기의 유한성을 명확히 한 이황이 영원성을 찾은 대상은 바로 이(理)였다. 이른바 귀신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영원성을 담보하는 이(理)일까? 그렇다면 그러면 귀신과 귀신의 덕의 관계, 다시 말해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 안에서의 이․기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이점에 대해서 이황은 스스로 명확한 이해를 얻지 못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주희는 그것을 둘로 나누는 것에 대해 반대했고, 이황도 그 이론을 알았지만 당시 이황의 사고 속에서는 이와 기가 뭉뚱그려져서 이(理)의 가치가 빛을 잃지 않도록 양자를 될 수 있는 한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심지어 귀신의 덕에 대해 “천명(天命)의 실리(實理)”라고 한 주희의 말조차 기록자의 오류가 아닌가 의심했다.33)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기로 설명되는 귀신의 개념 정의에 혼란이 오고, 그가 분명히 구분하고자 한 이․기의 관계도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이황은 여기서 더 이상의 논의를 펼치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는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귀신의 기적인 면과 이적인 면의 관계를 따지는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3) 이이(李珥)의 귀신론


  이황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양대 태두로 존숭을 받아온 이이(李珥)34)는 이(理)와 기(氣)의 의미와 역할을 분명하게 가르면서도 현상 세계의 모든 일들은 그 두 가지가 서로 의존하는 가운데 생겨난다고 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서경덕이 자연 및 인간 존재를 설명하면 이와 기의 경계를 두지 않은데 반해 이황이 그 두 가지의 영역을 판연히 구별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이는 그 구별되는 것이 항상 함께 있음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 인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그러했지만, 귀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이는 거기에 이적인 요소와 기적인 요소가 함께 하여 귀신의 존재와 제사의 의의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이의 귀신론은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어록>에서도 간혹 살필 수 있지만,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장문의 논설을 전개한 것은 귀신사생의 의의를 논하라는 책문(策問)에 답한 글이다.  이이에게 내려진 책문에는, ‘1) 제사 때 귀신과 감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불교의 윤회설과 제사의 귀신은 무관한 것인가? 3) 사람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되어 화와 복을 내릴 수 있는가? 4) 옛 성현이 섬긴 귀신은 어떠한 귀신인가? 5) 죽음과 더불어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무슨 이치인가?’ 등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3번 이하의 질문은 앞장에서 살펴 본 남효온의 논문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서 이이의 견해 또한 남효온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남효온 이황 등의 생각과 같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논쟁적인 성격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이이의 답변을 살피고 거기에 나타난 이이의 귀신 개념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불교의 윤회설을 부정하는 것과 제사의 의의를 인정하는 것 사이에는 서로 상충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생각, 아니면 적어도 상충하는 것처럼 생각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이 조선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는 꾸준히 보지되어 왔던 듯하다. 사후의 귀신의 존재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면 윤회전생(輪廻轉生)의 논의로 흐를 우려가 있고 또 그것의 존재를 아주 무시하면 가문의 계통을 유지하는 제사가 그 의의를 잃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성리학자들의 답변은 제사의 의의를 확신할 만큼 귀신의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긍정하되 그것이 윤회전생할만큼 영원한 것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이이는 먼저 사후에는 인간의 정신과 지각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윤회설을 공박하였다.


사람이 지각(知覺)은 정기(精氣)에서 나온다. 귀와 눈이 총명(聰明)한 은 백(魄)의 영(靈)이며, 마음이 생각하는 것은 혼(魂)의 영이다 그 총명하고 생각하는 기(氣)이며, 그 총명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이(理)는 지각이 없고 기(氣)는 지각이 있다.  그러므로 귀가 있어야만 들을 수가 있고 눈이 있어야만 색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있어야만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정기가 한 번 흩어지고 나면 귀는 들을 수가 없고 눈은 볼 수가 없으며 마음은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떤 물체에 무슨 지각이 있겠는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감각기관과 신체의 각 부분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때에도 지각이 없는데, 하물며 허공의 아득한 가운데 어찌 한 물건이 있어 귀가 없이도 능히 들을 수 있고 눈이 없이도 능히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없이도 능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미 지각이 없다고 하면 비록 천당과 지옥이 있다손 치더라도 누가 그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겠는가?35)


  불가(佛家)에서 윤회한다고 하는 이른바 인간의 마음은 성리학에서 보면 이(理)와 기(氣)가 합쳐진 형태로서 이가 형질 안에 깃들어 함께 일신(一身)의 주재(主宰)가 되는 것이니, 이와 기가 나뉘어지고 형질이 소멸되면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존재도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하다.36) 이이는 먼저 인간의 지각과 사려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기의 작용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좀 더 분석적으로 살피면 눈과 귀가 외물에 대해서 감수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음(陰)의 기가 모인 백(魄)의 작용이요, 거기서 받아들여진 정보를 가지고 마음에서 사려를 일으키는 것은 양(陽)의 기가 모인 혼(魂)의 작용이다. 그 기로 하여금 지각․사려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기와 함께 있는 이(理)이지만, 실제로 지각과 사려 작용을 행하는 주체는 우리 몸안에 담긴 정기(精氣)이다. 그리고 정기가 지각 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그것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심장(心臟) 같은 육신의 기관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기가 한 번  흩어지기 시작하면 되면 더 이상의 지각 사려 작용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몸체에서 독립된 지각의 존재라는 것부터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설사 흩어진 기가 지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한들 그 지각한 바를 가지고 사려할 수 있는 기관이 없는데 그 지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이는 인간의 지각․사려가 기의 작용이며, 그것은 사물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서 소멸해 가는 것이라는 논리로 사후의 영적인 존재의 항존성을 부인하였다. 성리학자가 성리학 자체의 논리로 불교 이론을 공박하는 것은 물론 객관적인 비판이 될 수 없지만, 자기 교설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하는 데에는 분명히 보탬이 되는 일이다. 윤회설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전개한 이 글에서 이이는 사후의 모든 존재는 지각도 없고 사려도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못박았다. 그것은 기를 생성․소멸하는 유한한 존재로 보는 성리학 이론을 확고하게 재천명한 것이다.

  이이가 그 다음으로 해명을 시도한 것은 기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의미 있고 또 중요한 일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각도 사려도 없는 귀신이 어떻게 제사를 흠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렇지만 제사지내는 것에는 이치가 있다. 사람이 귀신이 되었을 경우 그가 죽은 지가 오래 되지 않았으면 정기(精氣)는 비록 흩어졌다 하더라도 바로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게 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감통할 수가 있다. 이미 흩어져 버린 기는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지만, 나의 정성으로 그 분의 거처하던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거워하시던 일을 생각하고,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완연히 조고를 뵈워 항상 눈앞에 계시듯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기가 여기에 또한 모이는 것이니 공자의 이른바, ‘신명이 피어오르는 것을 마음으로 느낀다[焄蒿悽愴]’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37)


  이이의 이러한 설명은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되는 조상, 즉 아버지나 할아버지께 올리는 제사에 감통의 이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즉 기는 유한하여서 흩어져 소멸하는 것이지만, 그 소멸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손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할 수 있다. 자손들이 모여 망자(亡者)의 생시를 생각하며 그가 진실로 내 앞에 살아 있는 것처럼 정성으로 모신다면 비록 사라져 가는 과정 중에 있는 혼기(魂氣)라 할지라도 그 자손의 마음에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기(禮記)>> <祭義>편에서 공자(孔子)가 말했다고 하는, ‘신명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그것을 처연하게 느낄 수 있다[焄蒿悽愴]’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뜻이라고 이이는 설명한다. 그는 앞서서 사람이 죽으면 곧 지각과 사려가 없어진다고 강력하게 단정하지만, 제사의 의의에 관련해서는 그 점에 약간의 유예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단 귀신에게 감통의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에는 단서가 있다. 첫째, 죽은지 오래되지 않아 그 기가 완전히 흩어지지 않아야 하며, 자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 모든 귀신이 항구여일하게 감통의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의 이와 같은 설명은 가까운 선대의 조상이 제사를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 기가 남아 있지 않은 먼 조상에 대한 제사는 어떠한 의의를 갖는 것인가? 그것은 그저 자기 혈통의 근원에 대한 추념의 의미만을 갖는 것인가? 그렇게 단정해 버릴 경우, 먼 조상에 대한 제사의 의의는 크게 약화되고 만다. 실제로는 제사를 흠향할 귀신이 없는데 단지 자손들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로만 제사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연극과도 같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요 조상과의 유대감이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리학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이는 기가 완전히 소멸된 먼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불멸의 이(理)가 뒷받침해 준다고 설명하였다.


대가 오래된 조상은 그 기(氣)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 이(理)는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정성으로써 감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저 맑고 푸른 하늘에 본래 비가 올 기운이 없다가도 갑자기 구름이 모여들어 마침내 큰 비를 내리는 것은, 비록 비가 내릴 기운[氣]은 없었지만 역시 능히 비가 내릴 수 있는 이치[理]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대(遠代)의 조상은 감응할 수 있는 기가 없지만 지극한 정성으로 염원하면 마침내 감응하게 되는 것은, 비록 능히 감응할 수 있는 기(氣)는 없지만 감응할 수 있는 이(理)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이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면 이(理)로써 감응하는 것이다. 혹은 기(氣)가 있고 혹은 기가 없지만 그 감응한다는 점에 있어선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자손의 정신이 바로 조상의 정신이니, 나의 있음을 가지고 그의 없음에 감통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의심스럽겠는가?38)


  먼 조상은 후손들의 정성과 더불어 서로 감통할 수 있는 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불멸의 이(理)가 감통의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 조상에 대한 제사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제사와 마찬가지로 사자(死者)와의 감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이는 이러한 것에 대한 비유로 맑은 하늘에 구름이 모여 비를 내리는 것을 들었다. 운기가 없었어도 비가 내릴 이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먼 조상에 대한 제사 역시 단순한 추념이 아니라 실재로 일어나는 감통임을 말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론이 정립되게 되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이이의 경우 그의 다른 성리설과 완전한 정합을 이룬다고 보기 어렵다. 이(理)는 정의(情意)가 없으며 작위(作爲)의 능력도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조상과 자손이 서로 감통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가 움직여 주지 않으면 조상의 귀신은 생겨날 수가 없으며 자손의 마음과 교감을 할 수도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완전히 흩어진 기를 모이게 하는 것은 일종의 작위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설사 이가 기를 모으거나 하지 않고 그 이가 스스로 감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감응은 작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활성적인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 한 이를 매개로 하여 기가 소멸된 먼 조상과의 감응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채로 남게 된다.

  결국 이이의 귀신론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성리학의 기본 전제가 이․기(理氣)의 역할을 구분하여 작위의 능력을 성질을 기에만 부여하고 이에는 원리적인 성격만을 갖도록 했다고는 하지만, ‘올바른 것’,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자리에서는 그 무정의․무조작(無情意無造作)의 이가 스스로 영명한 감응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남겼다고 하는 점이다. 애초에 주희가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고, 작위의 능력을 변화하는 것에만 부여했을 때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윤리의 적극적 실현이나 조상과의 종교적인 감응 등에 대해 강열한 열망을 가질 때에는 변화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어느 정도 자율적인 힘을 갖기를 희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영남학파(嶺南學派)에서는 이(理)의 활성 능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이의 자발성을 끝까지 부인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도 점차 ‘이기의 섞일 수 없음’보다는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의 묘처’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조선 후기 낙학파(洛學波)의 귀신론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한 기호학파 성리학자들 중에서도 서울지역에 연고를 둔 이른바 ‘낙학파(洛學派)’의 학자들은 조선 후기에서 말기에 이르는 사이 가장 활발하게 학문 활동을 전개한 학자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학문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던 서울 지역에 연고를 둔 이들이 힘있는 문벌과의 유대를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선말기까지 힘있게 학통을 이끌어간 사람들이 그들이고 보면 조선후기 낙학은 당대 학문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 낙파의 학자들 가운데 이재(李縡)의 제자였던 김원행(金元行), 송명흠(宋明欽), 임성주(任聖周) 등의 학자들은 젊은 시절 한 데 어울려 강학을 하는 사이 귀신을 이기론적으로 해석하는 문제에 대해 정열을 쏟아 주목할 만한 논의를 이루어냈다. 이들의 귀신 개념을 살핌으로써 조선 후기 귀신론의 전개 방향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는 앞장에서 주로 제사의 귀신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았는데, 그때의 주된 관심사는 현상 속에 존재하던 사물이 유(有)의 세계에서 무(無)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에 두어졌었다. 그렇지만 귀신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로 펼쳐져 현상 속에 사물을 존재케 하는 것이기도 한다. 이렇게 유무(有無)의 세계를 오고가는 귀신은 이미 현실 속에 들어온 사물처럼 명료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변화 운행하는 실체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매우 역동적인 힘을 가진 활기찬 무엇으로 인식되어진다. 그 역동성은 물론 활성적인 기(氣)의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리학자들이 그것을 기적인 것으로만 단정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역동적인 귀신의 공용(功用)으로 생겨나는 다양한 현상 세계 속에서 그것이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는 소이연(所以然), 즉 도체(道體)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주희는 귀신에 대해서 “귀신의 덕은 천명(天命)의 실리(實理)이니 이른바 성(誠)이다”39)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명백히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이(理)에 결부되는 면이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귀신이 이처럼 이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존재라면, 그러한 개념의 귀신과 기라고 여겨져 온 종래의 귀신 개념 사이에 상충되는 점은 없는 것인가? 귀신은 이와 기 어느 쪽에 주안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이 옳은가?  이재의 제자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귀신의 문제는 바로 그것을 이와 기 어느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먼저 김원행의 글에서부터 낙론계 성리학자들의 귀신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김원행(金元行)의 귀신론


  김창흡(金昌翕) 및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낙론(洛論)의 학문을 계승한 김원행(金元行)40)은 주희가 중용의 귀신을 해석한 대목들을 연구하는 도중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이로 해석되기도 하고 기로 해석되기도 하는 점을 발견하고 귀신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가 제기한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용>>에서 귀신을 논한 것은 처음에는 그 덕이 매우 성대함을 논하고 뒤에 가서는 ‘성(誠)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라는 말로 끝맺었다.  주자는 또 말하기를 ‘성(誠)은 실제로 그러한 이치이다’, ‘ 귀신의 덕(德)이 되는 것은 성(誠)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것들은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하였음이 분명하다. 처음에 이런 글들을 읽고 그러려니 생각하다가 우암(尤庵)의 설도 바로 이와 같음을 보고서는 더욱 그것을 믿어 정론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강론하면서 다시 <<장구>>의 설을 이모저모 살피게 되었는데, ‘음(陰)의 영(靈), 양(陽)의 영(靈)이니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다’,  ‘그 기(氣)가 위로 발양함에 신명(神明)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니 이는 백물(百物)의 정(精)이요 신(神)의 드러남이다’ 등의 말은 모두 이(理)를 전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으며, <<혹문>>의 설도 대체로 기에 입각해서 한 말들이었다. 이에 예전의 생각들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었다.41)


  이 글에서 살필 수 있는 바와 같이 김원행은 주희의 귀신 개념에 두 가지 종류, 즉 주리적(主理的)인 것과 주기적(主氣的)인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양자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김원행이 귀신의 이․기(理氣) 문제 대해 의심하기 이전에 그가 가졌던 귀신 개념은 그것을 기보다는 이(理)에 가까운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이 점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기의 취산 과정으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귀신 개념과 거리가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김원행은 왜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  김원행으로 하여금 귀신의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 텍스트는 <<중용(中庸)>>이었다. 이른바 <귀신장(鬼神章)>이라고 불리우는 <<중용>> 16장 경문의 원래 의미는 제사지낼 때 귀신과 감통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우리가 앞장에서 살펴 본 ‘제사의 귀신’과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희는 그 중용의 귀신을 해석하면서 ‘천명(天命)의 실리(實理)’ 내지는 ‘성(誠)’이라고 하는 이적(理的)인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중용>>이라는 책 전체의 내용을 ‘자연과 인간을 관통하는 천도(天道)’의 대한 것으로 일관되게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와 같이 주리적으로 해석된 텍스트를 접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중용>> 16장의 귀신을 기보다는 이(理)에 가까운 것, 다시 말해 사라져 가는 조고의 혼백이라는 의미보다는 천도를 담아 드러내는 영명한 실체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희가 중용의 귀신을 해석할 때 그것이 제사의 귀신의 의미를 배제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김원행이 지적한 바와 같이 주희도 ‘귀(鬼)는 음(陰)의 영(靈)이요 신(神)은 양(陽)의 영(靈)이다’라고 하였고, 또 공자가 말했다고 하는 <<예기(禮記)>>의 기록, ‘그 기(氣)가 위로 발양함에 신명(神明)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니 이는 백물(百物)의 정(精)이요 신(神)의 드러남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이이(李珥)의 <死生鬼神策>에서도 보았듯이, 기의 혼백(魂魄)으로 설명되는 제사의 귀신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용>>의 귀신은 ‘천도를 담아 드러내는 영명한 실체’와 ‘제사 때 강림하는 혼백’의 의미를 모두 포섭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성리학적 귀신 개념의 원의에 입각해 볼 때, 귀신이란 유․무(有無)의 사이를 오고 가는 자연의 운행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이 도체(道體)의 내용을 현상화시키는 생성의 과정이든, 현상세계에 존재하던 사물이 죽어서 사라지는 소멸의 과정이든 다같이 ‘귀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김원행이 이 점을 몰라서 주희의 주석을 의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귀신을 후자의 측면에서 이야기 할 때는 주로 기를 언급하였는데, 전자의 측면에서 볼 때는 이(理)를 강조하니 귀신이라는 존재에 있어서 이․기(理氣)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원행은 이 문제 대한 오랜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문제에 대해 일찍이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았었는데도 그 답을 얻지 못하다가,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뜻은 <<장구>> 가운데 이미 명백히 말하였으니, 다름이 아니다. 다만 영(靈)과 양능(良能)을 구하면 충분하다. 영과 양능은 기(氣)의 기능(機能)의 지극한 묘처로서 이(理)와 더불어 하나로 섞여서 틈이 없는 것이다. 주자는 양능에 대해서 논하기를, ‘양능은 왕래굴신(往來屈伸)을 말하는 것이니 이(理)의 자연으로서 안배조치(按排措置)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기(二氣)는 음양이요, 양능은 그 영처(靈處)이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사람들에게 보인 뜻이 절실하다.42)


  귀신을 이로 해석할까 기로 해석할까 고민하다가 도달한 결론은, 귀신은 그 어느 것 하나를 위주로 설명할 수 없고 이와 기가 틈이 없이 합쳐진 묘처, 즉 양능(良能)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능이란 기의 기능(機能)이니 일차로 그것은 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 자체의 무질서한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에 붙어서 하나처럼 된 실리(實理)에 따라 발현하는 것을 말한다. 김원행이 특별히 공감한 주자의 말은 ‘귀신이 오고 가며, 굽고 펼쳐지는 것[往來屈伸]’ 그 자체가 이(理)의 자연(自然)이라고 한 말이다. 왕래굴신(往來屈伸)은 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의 자연성부터가 기 단독의 고유성이 아니라, 이(理)에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와 기의 밀접성은 지극한 것이며, 이는 실로 ‘한 데 섞여 틈이 없다[泯然無間]’고 할 만하다.  김원행이 과거에 이일까, 기일까 고민했던 것은 이와 기의 거리를 어느 정도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었다. 그 경우에는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한 가지를 가지고 이라고 하기도 하고 기라고 하기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 운행의 자연처가 바로 이라고 말할 정도라면 귀신을 이로 지목하든 기로 지목하든 서로 상충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김원행이 귀신의 개념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바였다.

  귀신을 그와 같이 정의하였을 때, 그래도 남는 의문 중의 하나는 주희가 귀신장을 주석하면서 귀신을 이른바 비․은(費隱), 즉 도(道)의 체․용(體用)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귀신은 이(理)라고 해석함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김원행은 다음과 같이 문답하였다.


비․은(費隱) 두 글자는 주자가 앞서 도의 체․용(體用)으로 설명하였으니 전적으로 이(理)를 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귀신이 전적으로 이를 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은(費隱)을 가지고 설명한 <귀신장> 끝 부분의 주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귀신은 바로 솔개나 물고기와 같은 의사를 담고 있다. 솔개와 물고기 날고 뛰는 것은 기이되 그것이 의지하여 따르는 곳은 모두 이 도의 체․용(體用)이다. 그러므로 비․은(費隱)으로 말한 것이다. 지금 이 귀신의 정상은 실리가 있는 바가 아님이 없어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不見不聞]’과 ‘모든 사물을 주관하여 주위에 있는 듯한 것[體物如在]’이 더욱 비․은(費隱)의 묘를 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43)


  솔개가 하늘로 비상하고 물고기가 물위에서 약동하는 것은 유형의 형질들에서 보여지는 현상이지만, 그것은 단지 기로 이루어진 형질이 있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요, 그 형질 속에 바로 도가 있어서 형질이 그것에 따라[恁地] 활발한 생명력을 드러낸 것이다. 제사지낼 때 귀신이 강림하여 주위에 가득 찬 듯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귀신의 기가 민연(泯然)하게 함께 존재하는 도의 체용(體用)에 따라 제사지내는 사람들의 기와 감통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귀신의 감통을 도체의 비은(費隱)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김원행의 <중용귀신설(中庸鬼神說)>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귀신을 논함에 있어서 이적(理的)인 면을 주목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고 하는 것. 둘째는 귀신의 이(理)를 중요시하는 생각이 종래의 형이하(形以下)의 귀신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 길을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妙)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김원행뿐 아니라 그와 같이 학문활동을 하였던 동시대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2) 송명흠(宋明欽)의 귀신론


  김원행과 함께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송명흠(宋明欽)44)은 귀신의 이기론적 해석에 있어서 김원행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졌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의 발단 원인은 앞에서 이미 살폈으므로 송명흠이 이 문제에 대해 내린 결론을 바로 말하자면, 귀신은 이(理)이면서 기(氣)인 것, 형이상에도 속하고 동시에 형이하에도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귀신을 그와 같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심(心)을 이․기(理氣)의 합으로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라고 하였다. 송명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음양(陰陽)의 묘용(妙用)으로서 천지(天地)의 실리(實理)이다. 그러므로 조화의 유행으로 말하면 공용(功用)․양능(良能)이 모두 형이하(形以下)에 속하고, 그 실리(實理)가 실린 것으로 말하면 성정(性情) 공효(功效)가 모두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면, 기(氣)를 주로 하여 말할 경우, 그 성(性)이 되고 정(情)이 되는 것이 모두 기의 동․정(動靜)이요, 이(理)를 주로 말할 경우 혹 중(中)이 되고 혹 화(和)가 되는 것이 모두 이의 체․용(體用)이 되는 것과 같다. 이는 이른바 귀신의 덕(德)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실리(實理)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서 <비은장(費隱章)> 머리에 군자지도(君子之道)를 말한 것과 뜻이 동일한 것이다.45)


  인간의 심(心)이 기(氣)라고 하는 것은 물론 주자에게서 비롯된 정의지만46) 도체의 현실적인 발용의 토대로서의 기의 존재를 중요시하는 기호학파 성리학에서는 그 명제가 특히 비중 있게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성리학에서 심을 기라고 한다고 해서 도덕적 사유의 기능으로서 일신의 올바른 삶을 주재해야 할 심을 전적으로 기에 속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심을 기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性)을 이(理)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상대적인 표현이며, 일신의 주재인 심은 기로 된 그릇 속에 성이라고 하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이른바 이와 기의 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은 기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이로 설명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기(氣)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태극(太極)의 이(理)가 인간의 형질에 의해 구체화된 성(性, 分殊之理)이나 그 성이 심기의 동력에 힘입어 구체적인 정신현상으로 형상화된 정(情)이 다 같이 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理)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인간의 마음이 발현하기 전에 완전성을 보지하는 것[中]이나, 발현 후에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는 것[和]이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 천리(天理)로서의 성(性)이 자리하기에 가능한 것이니 심은 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송명흠은 귀신의 존재도 심과 똑같이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유․무(有無) 사이에서 왕래굴신(往來屈伸)하는 음양(陰陽)의 양능(良能)은 기의 공효(功效)로서 귀신이 기임을 보이는 것이지만,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귀신의 성정(性情)이나 신묘불측(神妙不測)한 귀신의 공용(功用)은 그 기와 함께 이(理)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귀신과 인간의 심은 똑같이 이․기(理氣)가 혼융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유독 귀신에 대해서 이인지 기인지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송명흠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였다.


사람들이 저것<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으면서 이것<鬼神>에 대해서는 의심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공용(功用)․양능(良能)이라는 말이 이(理)를 해석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요, 둘째 불견불문(不見不聞)이라는 말을 가지고 은미한 도체[隱]라고 여기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이(理)와 기(氣)가 혼융하여 떨어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 묘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7)


  사람들이 귀신을 이(理)로 보는 것에 대해 의심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른바 귀신을 정의할 때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용어인 ‘공용(功用)’, ‘양능(良能)’이라고 하는 말이 일반적으로 이(理)와 관계하여 언급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기적(氣的)인 것으로만 간주해 왔던 데 있다. 주희(朱熹)도 분명히 ‘양능(良能)은 이(理)의 자연(自然)’이라고 하였고 정이(程頤)가 귀신을 ‘功用’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분명 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무엇인가 작용을 하는 것은 기(氣)의 역할이라고 하는 의식을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어서 ‘공용’, ‘양능’을 기에 대한 설명으로만 인식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두 번째는 주희가 <<중용장구>>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不見不聞]은 은(隱, 도의 체의 은미함)이요, 사물을 주관하여 주위에 듯함[體物如在]은 비(費, 도의 용의 광대함)’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견불문(不見不聞)은 감각적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뜻일 뿐 그것이 형이상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명흠은 사람들의 선입견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공용(功用)’, ‘양능(良能)’, ‘불견불문(不見不聞)’ 같은 용어만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氣)에 대한 말, 저것은 이(理)에 대한 말 하는 식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이와 기가 실은 혼융무간(渾融無間)한 하나임을 모른 데서 나온 실수라는 것이다.

  송명흠은 일반적으로 기의 작용 능력을 설명하는 데 쓰여졌던 공용, 양능이라는 말이 기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요, 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종래 기의 작용으로 설명되던 귀신의 모든 역할을 이제는 이의 작용이라고 설명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인가? 송명흠은 제사 때 귀신의 강림을 예로 들어 그 물음에 답하였다.


혹자가, “그와 같이 살핀다면, 제사 때 신(神)이 내리는 것도 또한 이(理)가 내리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돌아가는 것도 실제로 돌아가는 것이요 내리는 것도 실제로 내리는 것이다. 능히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은 기(氣)요, 내리는 것은 이(理)이다. 이가 있으면 기가 있고, 기가 행하면 이가 행하니, 이 어찌 혼융하여 틈이 없고 떨어지지도 섞이지도 않는 묘처가 아니겠는가?48)


  송명흠은 사후의 귀신이 돌아가는 것이나, 그 사이에 제사에 임하여 강림하는 것은 모두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니, 그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기이되, 그 기와 함께 오고 가는 것 자체는 이라고 설명하였다. 제사 때 귀신이 강림할 수 있는 것은 기가 있어서이지만 제사지내는 사람의 마음과 감통하는 주체는 이라는 이야기이다. 귀신의 이와 기가 그렇게 관계가 하고 있음을 안다면 제사 때 신의 강림이 이의 강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송명흠은 여기에서도 이와 기가 혼융하여 떨어지지도 섞이지도 않는 묘처를 보게 된다고 하였다.

  송명흠의 논설은 김원행과 귀신론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김원행의 경우 귀신을 이로 보는 생각을 먼저 전제하고 거기에 기적인 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송명흠은 귀신을 기로 보는 견해를 먼저 제시한 다음 거기에서 이적인 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모두 귀신을 이와 기가 혼융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양자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김원행도 송명흠도 이․기(理氣)의 불상리(不相離)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두 가지가 원천적으로 서로 혼동될 수는 없는 없다는 사실, 즉 이․기(理氣)의 불상잡(不相雜)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지 않는데, 그것은 이들이 이와 기의 개념적 차이를 분명히 하는 성리학의 기본 교설을 철저히 준수하는 입장에서 양자의 혼융(渾融)한 경지를 체득하려는 입장이었음을 알게 한다.


  3) 임성주(任聖周)의 귀신론


  귀신의 존재를 이와 기가 혼융한 묘처로 이해하는 시각은 임성주(任聖周)49)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철학을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의 형태로 발전시키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임성주는 젊은 시절 송명흠과 함께 <<중용>>을 강학하면서 그와 동일한 문제의식을 키워갔으며, 그 문제에 대해 김원행으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임성주가 귀신에 대해 초기에 가졌던 생각은, 김원행이 그러했듯이, 그것의 이적(理的)인 면에 더욱 주목하여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이(理)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었던 듯하다. 송명흠이 전하는 다음의 글에서 그 당시 녹문이 가졌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중사(仲思, 임성주의 자)는, ‘<<주역(周易)>>과 및 <<통서(通書)>>를 보면 신(神)을 이(理)로 한 것이 많은데, 이 말들이 옳은 듯해서 나도 일찍이 그와 같이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근래에 다시 깊이 생각해 보니 세 가지 장애가 느껴졌다. <<장구>>에서는 이미 덕을 성정이라는 말로 해석했는데, 먼저 무리하게 귀신을 이로 해석해 버리면 이른바 귀신의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理)의 성(誠)이라는 말이 돼 버리지 않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 장애이다. <<장구>>에서는 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은미함[隱]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공용(功用)의 자연처(自然處)를 불견불문(不見不聞)이라 하면 이것은 이(理)의 용(用)이 은미함[隱]이 되니 이것이 두 번째 장애이다. 귀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천지의 묘용(妙用)인데, 이제 이것을 오로지 이(理)라고 하면, 이(理)에 작용이 있어 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고,  도리어 기가 이를 타고 행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세 번째 장애이다.’라고 하였다.50)


  그가 ‘<<주역>>과 <<통서>>에 신을 이로 한 것이 많다’고 한 것은 신(神)을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천도의 운행으로 설명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천도의 운행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전적으로 이(理)에 연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개별 사물의 구체성을 논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성주는 <<중용>>에 나오는 귀신이라는 개념까지도 총체적인 묘용으로서의 신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하다가 논리적인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중용장구>>에서는 귀신의 덕을 귀신의 성정(性情)이라고 하고 다시 그것을 성(誠)이라고 하였는데, 귀신을 먼저 이(理)로 해석해 버리면 ‘이(理)의 성정(性情)이 성(誠)’이라는 말이 돼 버린다. 이는 그 자체로 실리(實理)이니 이(理)와 이(理)의 성정(性情)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또한 귀신은 천지의 공용(功用)이다. <<중용>>에서는 그것이 불견불문(不見不聞)이라고 하였으니 귀신을 이(理)로 해석하면 이(理)의 용(用)이 불견불문(不見不聞)한 것으로 된다. 하지만 주희는 불견불문(不見不聞)한 것은 미(微), 즉 도의 용(用)이 아니라 체(體)라고 하였다.  가장 곤란한 문제는 세 번째이다. 천지의 묘용이 그 자체로 이(理)라고 한다면, 그러한 이는 활동력을 공급해 주는 기의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셈이 된다.  사실 임성주의 이같은 문제 제기는 초학자에게나 있을 수 있는 미숙한 논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임성주가 신(神)이나 귀신(鬼神), 즉 묘용(妙用)의 능력을 갖는 활성적인 존재를 순수한 도체(道體)로서의 이(理)와 일치시켜 보려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임성주는 여러 해 동안 귀신의 이기론적 해석에 관해 고민하다가, 그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이기혼융무간지묘(理氣混融無間之妙)의 이론을 그의 스승 이재(李縡)로부터 듣게 된다.  이재는 귀신이 이인지 기인지를 묻는 녹문에게, “귀신은 양능(良能) 영처(靈處)라고 하는 것에 중요한 뜻이 있다. 음양(陰陽)은 본래 형이하의 존재이지만, 귀신은 형체와 소리가 없다. 음양이라고 하지 않고 귀신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이와 기가 함께 섞여 틈이 없는 묘처를 볼 수 있는 것이다.”51)라고 답하였다. 그 후 녹문은 김원행과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하는 도중 그의 감발을 받아 귀신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게 되었다.


귀신이라는 것은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요 음양의 영처(靈處)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영역을 논하면 당연히 형이하(形而下)의 존재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른바, 양능이다, 영처다 하는 것은 그 내용[實]이 있으니  형상이나 소리 냄새가 없이 단지 저절로 이와 같은 것(自然如此)이요, 이는 바로 주자가 ‘천지와 통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이(理)라고 부른다 하여도 무방하다.52)


  여기에서 임성주는 귀신이 형이하의 존재로서 기에 속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전재한다. 자신은 한 때 그것을 이(理)로 보고 싶어했지만, 귀신은 분명 작위의 능력을 가진 존재이니 형이하의 존재임이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신묘한 능력은 단순한 물질적 활동성이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自然恁地] 어떤 원리에 의한 것이니, 그러한 자연적 원리를 가리켜 말한다면 형이상의 존재, 이(理)라고 이름지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임성주는 귀신을 이적인 것으로 보고자 했던 자신의 의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양능의 자연처에 주목함으로서 그것을 이라고 할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였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능의 자연처를 이(理)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성리학 이론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일인가? 이 문제에 대해 임성주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누가 묻기를, “귀신을 이처럼 이(理)로서 말할 수 있다면, 주자는 왜 별도의 주석을 달아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게 하지 않고, ‘양능’, ‘영처’라는 말로 막연하게 설명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양능․영처는 귀신의 바른 의미[正義]이다.  비록 이(理)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어찌 양능, 영처 밖에 별개의 귀신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은 단지 하나의 지경[地頭]일 뿐이다.  구부리고 펼쳐질 수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기(氣)에 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요, 그 저절로 그렇게 되는[自然恁地, 原註:自然恁地도 주자의 말이다] 점으로 말하면 이(理)에 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터럭 하나로써도 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모두가 양능․영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原註: 이것이 바로 이․기가 함께 섞여 틈이 없는 묘처이다]”53)


  양능의 자연처를 가리켜 이(理)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임성주는 그가 이재에게서 전해들은 ‘이기혼융무간지묘(理氣渾融無間之妙)’로 설명하였다. 귀신의 이(理)는 귀신의 양능․영처 밖에 있는 별개의 이가 아니라 귀신의 굴신(屈伸)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귀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이와 기가 터럭 하나도 용납치 않는 혼융한 관계에 있음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기의 혼융무간지묘(渾融無間之妙)로서 귀신을 이해했다고 하는 점에서 녹문은 이재뿐 아니라 그의 동학인 김원행, 송명흠과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성주와 다른 학자들의 이론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차이점은 임성주의 경우 이기의 불상리(不相離)만이 강조될 뿐 불상잡(不相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불상잡(不相雜)을 전재하지 않고 불상리(不相離)만 강조할 경우 이와 기는 하나의 존재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임성주는 이때부터 귀신이라고 하는 것을, 형이상․하의 구분, 다시 말해 이(理)와 기(氣)의 두 세계의 구분을 지양한 통일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임성주는 이․기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성리학의 기본 교설을 인식하면서도 귀신은 그 양자의 구분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하였다.


무릇 천지간에는 이(理)와 기(氣)가 있을 따름이니, 이가 아니면 곧 기요, 기가 아니면 곧 이이다.  따라서, 혹 이이면서 기가 되어 그 두 가지 영역을 함께 점유하는 것은 있지 아니하되, 오직 귀신만은 그것을 기라고 해도 되고 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그 지극히 정미하고 지극히 신묘한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모양이나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리키는 바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지칭될 뿐이니, 이는 바로 ‘함께 섞여 틈이 없는 묘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기(氣)를 주로 하여 말하면, 음(陰)의 백(魄)이 귀(鬼)가 되고 양(陽)의 혼(魂)이 신(神)이 되니 이때의 귀(鬼)와 신(神)은 모두 형이하의 것이다.  이(理)를 주로 하여 말하면, 인․예가 신(神)이 되고 의․지가 귀(鬼)가되니 이 때의 신과 귀는 모두 형이상의 것이다.  [原註: 이 말을 듣고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히 완미해 보면 의심이 없을 것이다. 주자가 인(仁)은 목신(木神), 의(義)를 금신(金神)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54)


  임성주는 여기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이(理)와 기(氣)일 뿐이라는 성리학의 일반론을 자신도 긍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만큼은 이․기의 어느 쪽에도 분속시킬 수 없는 이․기의 혼융체(渾融體)라고 하는 주장을 양보하지는 않는다.  성리학의 일반론에서도 현상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그 어느것이나 이․기의 합으로서 그 속의 이(理)와 기(氣)는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임성주는 귀신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한 현상 사물의 수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마치 이․기와 동일한 위상에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이(理)와 기(氣)일 뿐이되, 예외적으로 이․기로 구분할 수 없는 귀신이라고 하는 것이 이․기와 같은 차원의 궁극의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셈이다. “기를 주로 하여 말하면 음양혼백(陰陽魂魄)을 가지고 귀신이라 하겠지만, 이을 위주로 말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도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이기이원론적인 성리학 본연의 입장에서는 하기가 어려운 이야기이다.

  임성주가 그와 같은 독특한 귀신론을 전개한 것은 그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보다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 깊이 경도되어 이와 기를 하나로 보기 시작한 데서 기인한다. 임성주의 그와 같은 학문 경향은 결국 만년에까지 이어져 그 자신의 철학을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로 귀결시켰다. 이 점에서 녹문의 철학은 기호학파 낙론계 성리학 중에서도 특수한 면모를 띤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이론 형성의 토대는 귀신(鬼神)이나 심(心)의 문제에 있어서 이기혼융무간지묘(理氣渾融無間之妙)를 강조한 낙론계 성리학자 공동의 학문 경향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전우(田愚)의 귀신론


  기호학파 성리학자의 한 사람인 전우(田愚)55)는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까지 학문 활동을 한 사람이다. 임헌회(任憲晦)를 스승으로 삼아 낙학의 학문을 계승한 그의 귀신론 역시 그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이기무간지묘(理氣無間之妙)에 착안하여 이(理)와 기(氣)가 혼융한 경지에서 귀신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전우는 <<중용>> <귀신장>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귀신장>은 도(道)의 광대하면서도 은미함을 이야기한 것이니 거기에 표현된 모든 것이 다 도리요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자사(子思)가 기(氣)에 입각하여 이(理)를 설명한 취지를 이해해야 하니, 만일 이것을 알지 못하고 곧바로 귀신(鬼神)의 덕(德)이 이(理)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理)가 기(氣) 위에 실린 묘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56)


  전우는 <<중용>> <귀신장>이 도(道)의 비․은(費隱), 즉 그 체(體)가 은미하면서도 그 용(用)이 광대한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가 귀신의 형질이 기(氣)라고 사실보다는 그 성정이 이(理)라고 하는 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는 점은 이 귀절에서 바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전우가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가 귀신을 이야기할 때 비록 그 도리적인 측면에 주안점을 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에 입각해서 그 기 위에 있는 이(理)를 지적한 것이지 곧바로 이(理) 자체를 언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우는 “귀신의 덕은 이(理)”라고 하는 명제를 틀린 말이라고 비판한다. “귀신의 덕은 기에 있는 이(理)”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우가 이렇듯 미세한 어구 사용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 역시 귀신의 올바른 의미는 이와 기가 혼융한 묘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혼융무간(渾融無間)이라는 말을 쓰는 대신 ‘기 위에 있는 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이와 기 두 가지가 의미의 중요성에 관계없이 대등하게 혼재되는 것을 막고 이(理)의 의미가 또렷이 부각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그가 취한 입장은 임성주가 나아간 방향하고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는 배제하고 이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처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극구 ‘귀신의 덕은 이(理)’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다. 전우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귀신은 이미 기(氣)이니 그 덕을 곧 바로 이(理)라고 할 수 없다. 선현 가운데 덕을 가리켜 이라고 한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솔개와 물고기가 날고 뛰는 것을 가리키며 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에 있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57)


  전우는 귀신의 덕에서 이(理)를 발견하는 것은 솔개와 물고기의 비상과 약동에서 도체의 활발한 유행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은 형상화된 형질에 깃들인 이(理)를 보이는 것일 뿐, 그 자체로 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귀신의 덕은 기 위에 있는 이를 지적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귀신의 덕을 가리켜 이라고 한 사람은 귀신의 덕을 형이상에 속하게 했다가 주희가 비판을 받은 바 있는 후씨(侯氏)일수도 있겠지만, 가까이는 김원행이나 송명흠 같은 낙학의 선배들일 수도 있다. 김원행이나 송명흠은 이기무간지묘(理氣無間之妙)의 입장에 선 상태에서 귀신의 덕을 이라고 한 것이니 전우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귀절만 잘라 놓고 보면, ‘기에 근거한 이’라는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되므로 전우가 그와 같은 비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선배들의 견해가 잘못되어서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래 의사가 자칫 언어의 장애로 소홀해질까 하는 염려에서 강조의 의미로 비판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귀신의 덕을 그 자체로 이라고 하지 않고 기를 매개로 한 이로 보는 시각은 자칫 귀신의 덕이 기의 부정적 제약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 지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전우가 그러한 의사를 담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선배들과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전우의 귀신론에서 그러한 의미는 발견되지 않는다. 전우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귀신으로서 귀신을 보면 천지의 공용과 음양의 양능이 어찌 귀신이 아님이 있겠는가? 도(道)로서 귀신을 보면 천지의 공용과 음양의 양능이 도가 아님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지와 성인과 귀신과 솔개․물고기는 모두가 다 일관된 도리이다.58)


  이이(李珥) 학문을 계승한 기호학파 성리학의 특징은 이(理)의 도덕 원리를 중시하면서도 그 도덕적 원리가 현상 속의 사물이나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의 힘을 필요로 함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가 없으면 이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기는 이의 실현을 돕는 보조자이지만 때로는 기가 이(理)의 가고자 하는 방향에 순응하지 못하는 경우 기는 이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이․기(理氣)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서 기가 이의 실현을 제약하는 부정적인 면에 주목하기보다는 이와 기가 조화롭게 혼융하여 이상적 원리를 실현하는 쪽을 더 많이 보고자 한 것이 기호학파 중에서도 낙론(洛論) 계열 학문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낙학(洛學)의 이와 같은 특징은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심론(心論)에서도 보이는 바지만 이기혼융무간지묘(理氣渾融無間之를妙)를 강조하는 귀신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기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기가 이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도체에 활발한 힘을 불어넣어 크고 바른 공용을 낳는 쪽으로 귀신의 개념을 정립해 나아간 것이다. 전우가 그의 귀신론에서 귀신의 덕은 독립된 이가 아니고 기 위에 있는 이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귀신에게서 유한한 기의 제약을 보기보다는 역동적인 도(道)의 유행을 보고자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5.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귀신론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귀신 개념을 살핌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은 실학자 정약용(丁若鏞)59)이다. 정약용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범주에 묶어 놓을 수 없는 독특한 내용의 철학 이론을 세운 인물인 만큼, 귀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주학(程朱學)의 이기론(理氣論)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귀신론과는 전혀 다른 학설을 주장하였다.  성리학의 귀신은 기본적으로 기(氣)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되었고,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理)와 기(氣)가 혼융무간한 경지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정약용은 귀신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 그 자체를 부인한다. 의도적으로 논의의 출발점에서부터 성리학적 귀신론과의 연결 고리를 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성리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개한 정약용의 귀신론을 살피고,  그의 귀신론은 어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를 그의 철학의 문맥 속에서 더듬어 보기로 한다.


1) 정약용의 귀신 개념


  성리학에서는 전통적으로 귀신을 정이(程頤)와 장재(張載)가 말한 “천지(天地)의 공용(功用)”, “조화(造化)의 자취[跡]”, “이기(二氣)의 양능(良能)” 등의 말로 정의하였다. 다산은 먼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정의가 잘못된 것임을 비판한다. 다음은 정이(程頤)의 말에 대한 반론이다.


정자는, “귀신은 천지의 공용(功用)이요 조화의 자취[跡]이다”라고 하였다. ..... 자취라고 하는 것은 발걸음이 남긴 흔적이다. 어른의 발자국이 있으면 앞서 어른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어린아이의 발자국이 있으면 앞서 어린아이가 그 곳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발자국은 지나간 흔적일 뿐 그것이 바로 어른이나 어린이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조화의 자취를 귀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지는 귀신의 공용이요, 조화는 귀신이 남긴 자취이다. 자취와 귀신만 가지고서 그것을 귀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60)


  정이가 귀신을 ‘천지의 공용’, ‘조화의 자취’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분명히 귀신을 독립적인 실체로 보지 않으려는 의사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성리학의 이론에서는 본체의 차원에서 오직 이(理)와 기(氣)가 존재할 뿐 별도의 귀신이라는 존재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공용이니 자취니 하는 말은 어떤 실체가 있고 나서 그것이 움직인 모습 내지는 그 흔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약용이 왜 정이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였는지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귀신을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체용론(體用論)으로 설명하지면, 성리학에서는 귀신을 실체[體]의 작용[用]이라고 하는 데 반해 정약용은 귀신이 바로 실체[體]라고 하는 것이다.  “천지는 귀신의 공용이요, 조화는 귀신이 남긴 자취”라고 한 말은 정이가 귀신을 정의한 명제의 주부와 술부를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정약용은 장재가 말한 “귀신은 이기(二氣)의 양능”이라는 말도 인정할 수 없었다. 장재(張載)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장자는 “귀신은 이기(二氣)의 양능이다”라고 하였다. ..... 이기는 음양(陰陽)이다. 해가 가리우면 음(陰)이 되고 해가 비치면 양(陽)이 된다. 비록 이 두 가지가 오고 가고 숨고 드러나면서 낮과 밤을 이루고 추위와 더위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의 됨됨이는 지극히 어둡고 고지식하며 지각이 없어 짐승이나 곤충의 무리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것이다. 어찌 양능을 가져 조화를 펼치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정결하게 의복을 성대하게 하여 제사를 받들 수 있게 하겠는가?61)


  정약용이 음․양(陰陽)을 단순히 빛과 그림자로 해석하는 것은 그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성이 인간의 선험적인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속에서 만들어지는 실천 덕목에 불과하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기(理氣) 어느 것에 대해서도 본체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결론이다. 음․양의 기가 모든 자연 현상을 있게 하는 본원적 실체가 아니고 단순히 빛이 비치느냐의 여부에 따라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신묘한 양능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정약용이 주장하고 싶은 귀신은 한갓 미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런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중용>>에서 언급하였듯이 천하 사람들이 정결히 재계하고 제사를 올리는 대상, 그 대상이 될 만큼 영명한 힘을 지닌 존재가 바로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약용 자신이 바른 의미로 생각하는 귀신의 개념은 어떠한 것인가? 그는 귀신의 종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주례(周禮)>>를 보면 태종백(太宗伯)이 제사지내는 귀신에는 세 가지 등급이 있으니, 첫째는 천신(天神)이요, 두번째는 지시(地示)요, 세번째는 인귀(人鬼)이다.62) 천신(天神)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상제(上帝)와 일월성신(日月星辰)․사중(司中)․사명(司命)․풍사(風師)․우사(雨師) 등이 그것이고, 지시(地示)는 사직(社稷)․오사(五祀)․오악(五嶽)․산림(山林)․천택(川澤)이 그것이며, 인귀라고 하는 것은 선왕(先王)․선공(先公)․선비(先妣)의 신주가 그것이다. 제사의 품계에는 비록 세 가지가 있으나 실은 천신과 인귀가 있을 뿐이다. ..... 하늘이 천신으로 하여금 물․불․쇠․나무․흙․곡식․산․시내․숲․못을 맡아 주관하게 하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서는) 임금이 신하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나누어 관장하게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신하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천신에 배향하여 사직․오사․산천에 제사지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시(指示)라고 부르는 거도 실은 천신과 인귀이다.63)


  정약용이 주목하는 귀신은 상고시대에서부터 제사의 대상이 되어 온 귀신이다. 일반적으로 제사의 귀신은 천신, 지시, 인귀 세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제사의 품계가 그러할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천신과 인귀 두 종류라고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약용은 귀신을 천신과 인귀로 구분한 위에 그 두 가지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이렇게 부연하였다.


<<예기>> <제의>편은 후세 사람이 지은 것이니 <<논어>>만큼 믿을만하지는 못하다.64) 하물며 거기에서 논하는 것은 인귀이지 천신이 아니다. <<주례>>에서는 본래 천신과 인귀를 구별하여 말하였으니 어찌 섞어서 한 종류로 하겠는가?65)


  천신과 인귀를 전혀 다른 것을 보아야 하는 까닭은 고경(古經)에서부터 그 두 가지가 따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라지만, 그가 그것을 강조하는 실제 이유는 천신과 인귀를 뭉뚱그려 함께 귀신으로 간주할 경우 유한한 인간 존재와 지존한 상제 사이의 간격이 불분명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양자를 구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양자 가운데 인귀는 죽은 후에 떠돌다 사라지는 혼령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논어>>에서 공자가 보인 태도처럼 그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특별한 해석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신으로서의 귀신은 자신의 상제(上帝)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천신으로서의 귀신은 상제의 명령을 받들어 자연의 운행을 관장하는 상제의 신하들이기도 하지만, 상제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주목하는 귀신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정약용은 <<중용>>에 언급된 귀신은 바로 상제를 직접 언급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중용>>에서 언급한 ‘귀신’이 바로 ‘상제’임을 알게 하는 증거를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천하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의복을 성대하게 하고 제사를 받든다고 하였으니 이 제사는 바로 교제(郊祭)이다. 교제에서 제사지내는 대상은 바로 상제(上帝)이다. 상제의 몸은 형체도 없고 형질도 없어서 귀신(鬼神)과 덕을 같이 하므로 귀신이라고 하였다. 다가와서 느끼게 한다는 뜻에서 귀신이라고 한 것이다. 66)


  정약용은 <<중용>> 16장의 “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라는 말을 세상 사람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행하는 제사로 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내는 제사, 즉 세상 사람을 모두를 대신해서 천자가 지내는 제사로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제사의 대상은 ‘상제’임이 분명하다고 한 것이다. 그는 또한  <<중용>> 1장의 “其所不睹”․“其所不聞”과 “莫見乎隱, 莫顯乎微” 12장의 “費而隱”, 16장의 “視之而弗見, 聽之而不聞” 33장의 “上天之載, 無聲無臭” 등의 귀절들은 모두 감각할 수는 없으나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무엇에 대한 언급으로서 유사한 문장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러한 구문들 가운데 16장에서는 그 존재하는 무엇이 바로 귀신임을 명백하게 밝히 있으니, 1장, 12장, 33장의 구문들도 모두 귀신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67) <<중용>>이라는 책 전체가 수미일관하게 담고 있는 내용은 바로 ‘상제’인 ‘귀신’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2) 정약용 귀신론의 의미


  그는 왜 귀신을 상제로 해석하는가? 그럴만한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가 인간 도덕성의 근원을 성리학에서처럼 이(理)로 보지 않고, 인격신적인 상제로 보는 데에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인간의 도덕성이 항구적으로 지켜지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인간들의 곁에 지켜 서서 그가 도덕을 행하는지의 여부를 감시하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그와 같은 감시자의 의미로 상제를 지칭한 것이 바로 귀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정약용의 이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유교적 도덕 규범을 존숭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는 정약용도 다른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은 성리학 이론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본래부터 인의예지와 같은 도덕 원리가 있어서 그것의 자발적인 발현으로 도덕이 실현된다고 보지만, 정약용은 그것이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행위의 결과라고 보았다.68) 인의예지 대신 정약용이 주장하는, 도덕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내적인 근거는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이다.69) 그렇지만 이 영명무형지체 안에는, 어린아이의 불행을 보았을 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발출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발출하는 따위의 구조적인 원리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싫어하는 도덕적 기호일 뿐이다.70) 게다가 정약용은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도덕적 기호뿐 아니라 아무것이나 먹고 싶어하고 아무데나 드러눕고 싶어하는 생리적 기호도 있다고 생각하였다.71) 이 두 가지 기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므로 모두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한다.72) 이러한 전제에서는 본연지성의 존재가 곧 인간의 도덕적 존엄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도덕적 기호와 생리적 기호와의 갈등을 극복하여 선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만 인간의 도덕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인간을 이처럼 갈등 속에 던져진 존재로 파악한 정약용은 그 인간들이 순수한 도덕적 의무감만을 가지고 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예와 덕은 기본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예와 덕이 항상 욕망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법(法)과 세(勢)의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 정약용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심이 없을 수 없다. 그 욕심을 좇아가게 되면 방자하고 사악한 짓을 못하는 게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짓을 드러내놓고 하지 못하는 것은 경계하기 때문이요, 두려워 때문이다. 누구를 경계하는가? 위에서 관리들이 법을 집행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위에서 자신에게 죽음을 내릴 수 있는 임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위에 임금이나 관리가 없는 것을 알고서도 방자하고 사악한 짓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73)


  관리에 의해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과 주벌(誅罰)을 내릴 수 있는 군주의 위세가 있을 때, 사람들은 도덕과 욕망의 갈등 사이에서 도덕을 택할 수 있다. 인간이 마음속에 선을 좋아하는 면이 없어서가 아니라, 욕망을 좇고자 하는 면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정약용의 윤리 의식 속에는 유가보다는 법가에 가까운 사고의 일단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군주와 관리의 엄격한 법 집행에 의해 도덕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면, 그의 철학은 분명히 법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진실로 염려한 것은 군주와 관리의 위세로도 통제할 수 없는 은밀한 부도덕, 즉 혼자 있을 때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저지르는 파렴치는 세속적인 규제로 막을 수가 없다. 정약용은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하였다.


어두운 방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속여 사악한 생각, 망령된 생각을 하고 간음과 도적질을 일삼다가도 다음날 의관을 바로 하고 단정히 앉아 얼굴 표정을 가다듬으면 허물 하나 없는 군자의 모습이 된다. 윗사람도 그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임금도 그의 잘못을 살피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남을 속여도 세상에서 명성을 잃지 않고, 제멋대로 악을 행해도 후세의 우러름을 받는 경우가 이 세상에 허다하다.74)


  남이 보는 데서는 악을 멀리하는 듯이 하지만, 군주와 관장의 눈을 피할 수만 있으면 온갖 파렴치한 짓을 거리낌없이 하는 것이 그의 눈에 더 많이 띈 인간의 모습이었던 듯하다. 도의심의 자발성에 의지하는 데 한계가 있고, 법과 위세의 힘을 비는 데에도 제약이 있다면, 도대체 무엇에 의존해야 하는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교적 경외가 인간의 도덕성을 궁극적으로 부지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개개인의 도덕성 여부를 감시하는 존재로서 ‘상제’라고 하는 초월적인 실체를 그의 철학 이론 속에 도입하였다.


해질 무렵 인적이 없는 묘지를 지나가는 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도깨비가 요귀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밤중에 산림 속을 지나가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호랑이와 표범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어두운 방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상제가 있어 그에게 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75)


  상제는 나날이 인간들에게 도덕적인 명령을 내리며 그것의 이행 여부를 감시하는 존재이다. 상제의 감시를 자각한 자는 그에 대한 두려움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도깨비의 존재를 아는 자가 밤중에 거리낌없이 공동묘지를 지날 수 없듯이....  사람들에게는 도의심뿐 아니라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 두 가지가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는데, 그 욕심이 자발적인 도의심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통제할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죄에 빠지도록 자신을 방기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상고시대에 도덕이 융성하였던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이 상제에게 지성으로 제사를 드리고 나날이 감시함을 믿었기 때문인데 반해 오늘날 도덕이 타락하게 된 이유는 하늘[天]을 이(理)로, 귀신(鬼神)을 이기(二氣)의 양능(良能) 따위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옛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고 귀신을 섬겼다. 동정(動靜)․사념(思念)이 싹틀 때에 혹은 성실하고 혹은 거짓되며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것을 경계하여 ‘나날이 감시함이 여기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신독(愼獨)의 절실함이 진실되고 독실하여 하늘의 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늘[天]을 이(理)라고 하고 귀신(鬼神)을 공용(功用), 조화(造化)의 자취,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 하여 아득하고 막막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치 지각(知覺)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어두운 방안에서 마음을 속이고 거짓됨에 거리낌이 없으며 종신토록 도(道)를 배워도 요순(堯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귀신(鬼神)의 설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76)


  정약용이 정이 장재와 같은 선유들의 귀신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고, 이기론에 기반한 성리학의 귀신론과는 전혀 다른 귀신 개념을 세운 것은, 성리학에서처럼 귀신 개념을 본체와 현상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도구로 쓰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성을 부지해 주는 수단으로 쓰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들이 자발적인 도의심의 발현으로 도덕 실천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약용이 본 사람들의 도덕성은 그렇게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덕 본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그것의 사회적 확충을 목표로 발전해 온 성리학 자체의 입장에서만 보면 정약용의 주장은 인간의 주체적 덕성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옛날로 돌아가려는 듯한, 퇴행적인 철학이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이러한 주장을 편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도덕의 실현을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던 세속적인 유학자들에게 대한 실망이 그로 하여금 사람들의 도덕성을 부지해 줄 다른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성리학적 도덕 관념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던 초현실적인 존재, 즉 ‘귀신’과 같은 존재를 도덕의 감시자로 상정할 경우,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도덕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정약용의 귀신론에 깔린 의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조선 초기의 남효온(南孝溫)으로부터 조선 말기의 전우(田愚) 및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는 9인의 귀신론을 통하여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개진한 귀신에 대한 이론들을 살펴보았다.

  귀신이라고 하는 문제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부터가 유학 이외의 다른 종류의 철학 사상에서는 찾아보기 힘은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유학이 다른 철학 사상에 비해 비과학적이기 때문이 아니요, 그와는 정반대로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마저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투철한 학문적 정신이 유학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본론에서 살펴 본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귀신론은 바로 전통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학문적 노력의 산물들이다.

  15세기에 후반기에 살았던 남효온(南孝溫)의 경우, 그가 한 역할은 종래의 미신적 귀신 개념을 타파하고 귀신에 대한 논의를 합리적인 논의의 차원에 두는 것이었다. 이때의 합리적인 논의의 지반은 말할 것도 없이 성리학의 존재론, 즉 이기론(理氣論)이다. 불가사의한 난신괴력(亂神怪力)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 가운데 이기론의 체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그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설명해 내고, 합리적 설명의 여지가 없는 기담(奇談)들은 그것이 미신임을 밝혀 세인들의 미혹을 풀어 주는 것이 그 시대에 전개된 귀신론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이 이론 발전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라고 이야기되어진다.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이이(李珥) 등 후대에 길이 영향을 남긴 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확실한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글의 본문에서는 이들이 남긴 귀신에 대한 논의 가운데, 주로 제사의 의의와 관련된 것들을 고찰하였다. 제사라고 하는 것은 조고(祖考)의 혼백을 모시고 그들을 추념하는 의례로서 인사(人事)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인사의 의례가 한낮 연극적인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연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자연의 도리인지, 그 자연의 도리와 제사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서경덕과 이황․이이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답변을 제시하였다. 서경덕은 이․기(理氣)라는 존재를 함께 묶은 듯한 일원적(一元的)인 기(氣) 개념에 입각하여 인간의 사후에도 그 지각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의 형질은 모였다 흩어지지만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기 그 자체는 항구히 존재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후에도 그 사람의 기는 불멸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황과 이이는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분한 가운데, 귀신을 일단 그 가운데 기적인 것에만 속하는 유한한 존재로 못박았다. 제사의 대상인 귀신에게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가 아니고 이(理)이다. 영원한 이에 뿌리박고 날마다 생겨나는 기가 있어서 정성 들여 구하는 자손의 마음에 감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황과 이이가 설명한 문제들은 제사의 대상인 조고(祖考)의 귀신의 존재를 이기론적 자연관의 토대 위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조선시대에 제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조상을 추념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통해 가문의 통서에 대한 의식을 공고히 하고 가정 내의 도덕 질서를 확립하여 그것을 사회적 윤리 질서로까지 확산시켜 나아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설명한 내용, 기(氣)의 점진적 소멸 및 이(理)의 항존성 두 가지를 토대로 조고에 대한 제사의 의의를 설명하는 것은 주희의 시대에 이미 확립된 이론이지만 조선 사회에 큰 영향력을 드리운 이들에 의해서 그 이론들이 깊이 반추되어 설득력 있게 설명된 것은 그 시대의 윤리 질서 확립 면에서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들이 기(氣)의 취산(聚散) 작용으로 귀신을 설명하면서도 이(理)의 존재를 깊이 의식한 것은 조상의 귀신을 섬기는 의례 속에서 항구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귀신론에서 이와 기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보는 이론이 발전한 것은 그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 19 세기 기호학파(畿湖學派) 낙론(洛論) 계열 학자들의 귀신론을 통해 살펴 본 문제는 그들이 모든 존재의 기반인 이와 기가 현상 사물의 생성 소멸의 과정 속에서 서로 혼융해 있는 경지를 체현한 사실이다. 성리학에서는 일단 이와 기를 전혀 다른 별개의 물사로 간주하지만, 현상 세계의 사물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이와 기 두 가지를 함께 가짐으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묘용이 현상적 사물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존재한다고 보고 귀신을 그러한 묘용의 주체로서 이해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이해에 도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理)의 순수성과 도덕적 가치에 대한 열망은 그 이가 원리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스스로 작용할 수 있기를 희구하게 만들었는데, 이와 기가 유별하게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도체의 활발한 묘용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낙론계 학자들은 <<중용>>에서 찬미한 귀신 개념을 매개로 이와 기가 혼융하게 섞여 윤리성과 활동성을 함께 발휘하는 도체(道體)의 기능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귀신은 기의 취산에 의해 한시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항구적인 이와 더불어 끊임없이 생겨나 도체의 순수한 생명력을 현상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계에서 귀신에 대한 논의가 발전해 간 자취를 더듬어 본 결과, 거기에는 첫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미신적 관념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이해의 차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성리학적인 귀신론을 설명한 것, 두 번째, 이와 기의 개념의 차이를 명확히 한 상태에서 주로 기적인 측면에서 귀신의 존재를 설명한 것, 세 번째, 도체에 보다 활발한 활동력을 부여하려는 시각에서 이기혼융무간지묘(理氣渾融無間之妙)로 귀신의 존재를 설명하고 그것이 도체를 현상화하는 주체라고 인식한 것 등의 주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논의들이 꼭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잘라 말할 수 없다. 남효온에서부터 전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논한 모든 귀신론의 실마리가 실제로 주희(朱熹)의 저작 속에서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안에서도 선대(先代)에 이루어졌던 논의가 후대(後代)에 다시 반추되기도 하고 또 후대에 여러 사람에 의해 논의되는 주제가 선대의 누구에서 이미 찾아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체적인 흐름을 조망해 보면 조선 성리학 귀신론은 주제는 이기론의 전반적인 변화 추세에 따라 그 논점을 조금씩 바꿔 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 성리학이 전반적으로 변화해 간 방향은 아마도 이(理)와 기(氣)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여 이(理)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려고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강조한 입장에서 점차 기(氣)가 이(理)를 도와 도체를 실현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입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주재 능력을 가신 심의 위상을 높이는 논의가 강화된 것이 인성론에서 보이는 예라고 한다면, 귀신을 이․기(理氣)의 혼융체로, 그것의 공용을 도체의 실현으로 보았던 것은 본체론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의 흐름 속에서 발전해 온 귀신 개념을 살펴 본 후, 그것과는 매우 상이한 정약용(丁若鏞)의 귀신 개념을 살펴보았다. 정약용 철학의 이론적 틀과 내용 자체가 여타의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많이 다른 만큼, 양자의 귀신론 역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하나의 논문에서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그것이 모두 조선시대에 ‘귀신’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나타난 이론들이기 때문에 그 한 부분을 빠뜨릴 수 없어서 함께 다루어 본 것이다.

  정약용은 인간의 내재적 도덕성의 자발적 발현에 의존하는 성리학적 도덕론이 당대 사회에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개개인의 윤리성을 감시하는 초월적인 존재인 상제를 상정하였으며, 귀신, 특히 <<중용>>에서 언급된 귀신은 그러한 상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정약용의 그와 같은 논리에 따라면 비록 상제와 일체시되는 <<중용>>의 귀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귀신이란 이(理)나 기(氣) 등으로는 해석될 수 없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는 것이다.  정약용은 성리학자들이 귀신을 이기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 것은 큰 잘못이며, 이 잘못이 바로  그 시대의 도덕성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귀신론은 성리학의 귀신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라고 보아야 할까? 두 이론의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 사이에 서로 맥락이 통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성리학의 귀신론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점 이와 기의 차별성보다는 그 혼융성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되어 갔으며, 그 결과 귀신 개념 속에는 본체의 순수성과 현상 세계에서 작용하는 역동성이 함께 있는 것으로 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미약하나마 양자의 접점이 발견된다. 다시 말해,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도 귀신은 단순히 이와 기의 작용에서 빚어지는 2차적인 현상이 아니라, 쪼갤 수 없는 하나의 실체로 보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져 갔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약용이 귀신을 곧바로 독립된 실체로 본 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이기혼융에 대한 관심이 높아간 것은 분명히 인성론에서의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순수리(純粹理)인 성(性)보다 현실에서 공효를 발휘하는 심(心)에 모여진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그들은 인간에서나 자연에서 다 같이 이와 기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추상적인 데 머무는 것보다는 하나의 실체를 이루어 현상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것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진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정약용이 인간 내면에서 인간 도덕성의 근거가 된다고 한 ‘영명무형지체’나 인간의 밖에서 도덕성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상제’ 내지는 ‘귀신’은 다같이 순수한 추상적 원리 또는 그 반대의 조야한 물질적 질료가 아니라, 선에 대한 욕구[嗜好]를 일으키거나 그 선에서 일탈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야기시키는 역동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지향해 간 방향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들의 경우 그 지향하는 바의 추구가 어디까지나 정주학(程朱學)의 이기론적(理氣論的) 틀 안에서, 그것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데 반해, 정약용은 대담하게 이기론의 제약을 넘어서서 곧바로 인간 도덕성의 지지자를 실체화하는 새로운 이론을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의 귀신론은 그의 철학이 전통적인 성리학의 연장선상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저서로는 <<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


2)  “鬼者歸也, 神者伸也. 然則天地之間, 至而伸者, 皆神也, 散而歸者, 皆鬼也.”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5a )


3)  “姑擧其天者言之, 有昭昭之多, 而日月星辰繫焉, 春夏秋冬化焉者: 所謂天神也. 有撮土之多, 而五岳四瀆載焉, 飛潛動植育焉者: 所謂地神也. 得天地中和之德, 昭然與日月同其虧盈, 與四時同其吉凶者: 所謂人神也. 鎭置不動而生草木, 藏萬物․興財貨於人間者曰山神. 流動充滿而生蝦蟹․卵魚龍, 使寶藏流行於世者: 曰水神. 使五行相生相克, 滋養五穀而維持民命者: 曰穀神. 所以敷榮發育曰草木之神. 所以主人一家曰五祀之神. 其著者氣也, 其微者理也; 摠而言之曰鬼神.”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5b )


4)  “以形體謂之天, 以主宰謂之帝, 以功用謂之鬼神, 以妙用謂之神, 以性情謂之乾.” (程頤, <<周易傳>> 乾卦)


5)  “人之生也, 莫不具無極之眞․二五之精, 而俱在於造化․功用之內; 人死而何歸? 曰: 體魄歸于地, 魂氣則無不之也. 曰: 之而有形乎? 曰: 鬼無形也. 曰: 有聲乎? 曰: 鬼無聲也. (曰:) 有心乎? 曰: 鬼無心也. 曰: 無形․無聲․無心, 而君子以爲盡其誠則享之, 何物享之乎? 曰: 氣享之也? 氣之享也, 何以知之? 曰: 驗於吾心而知之.”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6b )


6)  “氣聚而爲人, 氣散而爲鬼, 人與我一理也; 而况祖宗之於子孫, 喘息呼吸有通於身上, 無彼疆․此界之殊. 有感於子孫, 則有動於神明, 昭昭無疑也. 故直哉惟淸, 而愀然如復見父母之誠, 泂然於方寸之間; 則所謂無形者, 可使爲有形也; 所謂無聲者, 可使爲有聲也; 所謂無心者, 可使爲有心也; 而昭昭於左右, 充滿於上下, 賁然如草木之敷榮.”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6b-37a)


7)  “或曰: 然則祭鬼得福, 亦有理乎? 曰: 然. 曰: 吾子旣以鬼無形聲與心, 何物禍福之乎? 曰: 鬼神之享不享, 人之禍福, 自然黙定於冥冥之中. 非鬼神禍某而福某也. 譬如農夫治畝, 種小者穫小, 種多者穫多. 是乃人之自取禍福, 非鬼神怵人禍福也.”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7b)


8)  “夫臣爲君, 子爲父, 婦爲夫, 弟爲兄, 朋友爲朋友, 迫切之至情, 無一毫私僞, 而純於天理之正, 則此感彼應之理, 有不期然而然者矣. 論之至此, 則非可以言語形容. 周公金藤之祝, 黔婁北辰之禱, 扣氷魚躍有若王祥, 泣竹笋生有若孟宗, 夫豈無理而然哉?”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8a)


9)  “曰: 然則良霄死而禍鄭國, 彭生死而禍齊襄, 如意死而禍呂后, 灌夫死而禍田蚡; 旣曰無心, 則此皆誣耶? 曰: 此則非誣也. 乃道理中之一種道理也. 夫人得是理而生, 順是理而終, 則魂升魄降而耳. 豈有一箇心, 行胸臆․作威福於其間哉? 若所得之理未盡而遽死於 鋒鏑, 則心凝而不散, 憤結而未泄, 坱圠醜穢之氣, 未必無觸人襲殺之理. 此則鬼神之變也, 非常理也.”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0b-41a)


10) “曰: 然則此厲固與天地長存而不滅者乎? 曰: 不然. 久而自滅矣. 非如火之初滅也, 有溫其熏人, 炙手可熱, 久則此氣亦無有矣.”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1b)


11) “曰: 非鬼也, 非誣也. ..... 斯乃天地之間慝氣也. 韓子所謂物怪是也. ..... 夫物久則動, 動則變, 理也. ..... 天地之生久矣, 其用氣也多矣, 用氣多則慝氣奸其間, 易理也.”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3b-44a)


12) “然則巫覡之事, 擧皆不信乎? 曰: 神人一體, 巫若誠一無僞若巫咸, 則豈不感通神明哉? ..... 今之巫者, 率執左道以愚黔黎爲事. 若夫日月星辰, 非天子則不祭, 巫設七星之神; 名山大川, 非諸侯則不祭, 巫引山川之神; 凡人之疾病, 出於元氣之不調, 巫指爲鬼神之崇, 强爲無稽之說, 以糜無益之費.”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8b-39a)


13) “曰: 請卜鬼神有理乎? 曰: 有之. 鬼神是道. 依其理而請之, 則神必假筮而告之, 所欲非理, 所請非誠, 則神或咈意而不答.”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9a)


14) “某山蔽某隅, 則風氣和, 某水走某方, 則水氣戾; 以風水之和戾, 占生人之安否, 則近乎理矣. 若曰某鬼守某方, 某星臨某地, 水犯某鬼而凶, 水入某星而吉, 靑龍走而凶, 白虎來而吉, 則誣人甚矣; 君子所羞說也.”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39b-40a)


15) “今夫時疫之家, 傳相染人, 人以爲鬼神, 信乎? 曰: 斯則非鬼也, 乃天行之氣也 .... 夫人氣和於下, 則天氣和於上; 人氣乖於下, 則天道應於上矣.”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6b)


16) “以我國觀之, 平安․黃海多咳嗽, 忠淸․全羅多脚氣. 人以爲有鬼神而禱之, 信乎? 曰: 斯則非鬼也, 乃地行之病也. ..... 夫風氣無心, 遇水土之異, 而自爲瘴毒. 人若心不守身, 則觸之而自病, 犯之而或死.”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7a)


17) “曰: 瘧之爲病也, 人以爲炎帝之子, 斯鬼乎? 曰: 斯則非鬼也, 寒熱不調, 五內感傷, 則有此病. 曰: 其爲病也往來有度, 方士威之得逐, 避之得免. 高力士․杜子美以來皆然, 獨非鬼乎? 曰: 心是一身之主 .... 及夫湥信方士之術, 心舒而氣暢則疾病自已.” (南孝溫, <鬼神論>, <<秋江集>> 권5, 47ab)


18)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 시호는 문강(文康).


19) “程曰: 死生人鬼, 一而二, 二而一, 此盡之矣. 吾亦曰: 死生人鬼, 只是氣之聚散而已. 有聚散而無有無, 氣之本體然矣.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ab)


20) “氣之湛一淸虛者, 瀰漫無外之虛. 聚之大者爲天地, 聚之小者爲萬物. 聚散之勢, 有微著久速耳. 大小之聚散於太虛, 以大小有殊. 雖一草一木之微者, 其氣終亦不散; 況人之精神知覺, 聚之大且久者哉!”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b)


21) “形魄見其有散, 似歸於盡․沒於無. 此處率皆不得致思. .... 氣之湛一淸虛, 原於太虛之動而生陽․靜而生陰之始, 聚之有漸, 以至博厚爲天地․ 爲吾人. 人之散也, 形魄散耳. 聚之湛一淸虛者, 終亦不散. 散於太虛湛一之中, 同一氣也.”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b)


22) “其知覺之聚散, 只有久速耳. 雖散之最速, 有日月期者, 乃物之微者爾. 其氣終亦不散. 何者? 氣之湛一淸虛者, 旣無其始, 又無其終. 此理氣所以極妙底.”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6a)


23) “雖三先生之門下, 亦莫能皆諧其極, 皆掇拾粗粕爲說爾.” / “學者苟能做工, 到此地頭, 始得覰破千聖不盡傳之微旨矣.” / “見到千聖不盡傳之地頭爾. 勿令中失, 可傳之後學, 遍諸華夷, 遠邇知東方有學者出焉.”  (徐敬德, <鬼神死生論>, <<花潭集>> 권2, 15a-16b)


24)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4).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 (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 시호는 문순(文純).


25) “程子所謂‘道有來, 但去尋討’者, 其意非謂眞有, 蓋以爲有亦不可, 以爲無亦不可, 當付之有無之間之意耳. 而花潭則以爲眞有, 其物聚則爲人物, 散則在空虛, 迭成迭壞, 而此物終古不滅; 此與一箇大輪廻之說, 何擇歟?”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6b-7a)


26) 因思花潭公所見, 於氣數一邊路熟, 其爲說未免認理爲氣, 亦或有知氣爲理者, 故今諸子亦或狃於其說, 必欲以氣爲亘古今常存不滅之物, 不知不覺之頃, 已陷於釋氏之見, 諸公固爲非矣.”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8b)


27) “滉前以爲氣散卽無, 近來細思, 此亦偏而未盡. 凡陰陽往來消息, 莫不有漸; 至而伸․反而屈, 皆然也. 然則, 旣伸而反於屈, 其伸之餘者, 不應頓盡, 當以漸也; 旣屈而至於無, 其屈之餘者, 亦不應頓無, 豈不以漸乎?”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8b-9a)


28) “火旣滅, 爐中猶有熏熱, 久而方盡, 夏月, 日旣落, 餘炎猶在, 至夜陰盛而方歇, 皆一理也.”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9a)


29) “古者,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非謂無其理而姑說此以慰孝子之心, 理正如此故也.”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9a)


30) “朱子以屈中又有伸, 爲鬼之有靈, 非必謂鬼以旣屈之氣轉回來, 形現爲靈也, 但言方屈之氣, 而亦有靈, 其靈處謂之屈中之伸可也云爾. 豈可與冰水凝釋, 一往一回, 與輪之周轉之說, 比而同之哉.”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권14, 8b)


31) “朱子鬼神只是氣之屈伸一條, 與侯氏說不見有異, 而或問深斥侯說, 殊不可曉. 更細參詳朱子答門人問鬼神德, 曰: 此言鬼神實然之理, 猶言人之德, 不可道人自爲一物․其德自爲德. ..... 侯氏則以鬼神爲形以下之一物, 指其所具之理, 以爲形以上之一物, 是以鬼神與德, 判然認作二物看. 朱子所以非之者, 正在於此也.” (李滉, <答李叔獻問目>, <<退溪集>>  권14, 32ab)


32) 주희(朱熹)가 <<중용혹문>>에서 후씨(侯氏)의 설을 논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후씨(侯氏)는 말하기를 ‘귀신은 형이하(形以下)의 것이니 성(誠)이 아니요, 귀신의 덕(德)이 성이다’라고 하였다. 경문을 살펴보면 귀신의 덕의 성대함을 찬양하다가 결론을 맺기를 ‘성(誠)의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귀신의 덕이 성대한 소이가 바로 성(誠)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지 성(誠)이 독립적인 한 사물로서 따로 귀신의 덕(德)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후씨는 귀신과 그 덕을 둘로 나누어 형이상(形以上), 형이하(形以下)로 말하였으니 얼핏 보면 그럴듯하나 자세히 경문의 사리로 구하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朱熹, <<中庸或門>>)


33) “朱子謂‘其德則天命之實理’等語, 其辭義曲折之間, 亦似欠商量. 恐記者之失旨也.” (李滉, <答李叔獻問目>, <<退溪集>> 권14, 33a)

    이황이 의심한 주희의 말은 “鬼神之德, 卽天命之實理, 所謂誠也.” (朱熹, <答呂子約書>, <<朱子大全>> 권47, 14b)


34) 이이(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는 문성(文成).


35) “蓋人之知覺, 出於精氣焉. 耳目之聰明者, 魄之靈也; 心官之思慮者, 魂之靈也. 其聰明思慮者, 氣也; 其所以聰明思慮者, 理也. 理無知而氣有知, 故有耳然後可以聞聲, 有目然後可以見色, 有心然後可以思慮矣. 精氣一散, 而耳無聞, 目無見, 心無思慮, 則不知何物有何知覺耶? 七竅百骸, 雖不潰散, 而尙無知覺; 則而況太虛杳茫之中, 安有一物, 無耳而能聞, 無目而能見, 無心而能思慮者哉? 旣無知覺, 則縱有天堂地獄, 誰知苦樂哉?” (李珥, <死生鬼神策>, <<栗谷集>> 拾遺 권4, 22ab)


36)  성리학자들의 배불론(排佛論)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이가 비판하는 윤회설(輪廻說)은 실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기보다 성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다고 믿는 불교의 윤회설이다. 불교에서 실제로 마음과 지각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성리학자들은 불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이가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이론이다.


37) “其所以祭祀者, 則抑有理焉. 人之爲鬼也, 其死不久, 則精氣雖散, 而未卽消滅, 故吾之誠敬, 可格租祖考矣. 彼已散之氣, 固無聞見思慮矣; 而以吾之誠, 思其居處, 思其笑語, 思其所樂, 思其所嗜, 而宛見祖考常在目前, 則已散之氣, 於斯亦聚矣. 孔子所謂焄蒿悽愴者, 其不在此歟!” (李珥, <死生鬼神策>, <<栗谷集>> 拾遺 권4, 22b-23a)


38) “若其世系之遠者, 則氣雖滅, 而其理不亡, 故亦可以誠感矣. 今夫靑天白日, 故無能雨之氣矣, 而陰雲倏集, 遂致大雨者, 雖無能雨之氣, 而亦有能雨之理故也. 遠代先祖, 故無能感之氣矣, 而一念至誠, 遂致感格者, 雖無能感之氣矣, 而亦有能感之理故也. 是故, 其死不久, 則以氣而感; 其死已久, 則以理而感. 或有氣, 或無氣, 而其感格則一也. 而況子孫之精神, 乃祖考之精神, 則以我之有, 感彼之無者, 亦何疑哉?” (李珥, <死生鬼神策>, <<栗谷集>> 拾遺 권4, 23a)


39) “鬼神之德, 卽天命之實理, 所謂誠也.” (朱熹, <答呂子約書>, <<朱子大全>> 권47, 14b)


40) 김원행(金元行): 1702(숙종 28)~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김창협(金昌協)의 양손자이며 김창흡(金昌翕)․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


41) 中庸之論鬼神, 始言其德之極盛, 終又結之曰: ‘誠之不可揜如是’. 朱子又言: ‘誠是實然之理’, ‘鬼神之爲德者誠也’. 然則其爲主理而言審矣. 始讀之, 未嘗不以是爲正; 及見尤翁說正如此, 自此益信之, 以爲定論. 後因與人講論, 更翫章句之說如曰: ‘陰之靈, 陽之靈, 二氣之陽能’, 如曰: ‘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 此百物之精也, 神之著也’; 凡此皆若不專主乎理, 而或問則大抵皆就氣上說矣. 於是又疑前見之不足以自信也. (金元行, <中庸鬼神說>, <<美湖集>> 권14, 27b-28a)


42) “盖嘗反覆思之, 而不得其說. 一日忽怳然自笑曰: 斯義也章句中已自明言之, 無他只求之靈與良能族矣. 靈與良能是其氣之至妙, 而與理合一泯然無間者也. 朱子又論良能曰: ‘良能是說往來屈伸, 乃理之自然, 非有按排措置, 二氣則陰陽, 良能是其靈處’, 其示人之意切矣.” (金元行, <中庸鬼神說>, <<美湖集>> 권14, 28a)


43) “費隱二字, 朱子盖嘗以道之體用爲言, 則其專乎主理可知矣. 今以鬼神爲非專主乎理者, 而乃於章下註以費隱爲說, 無乃不類乎? 曰: 此鬼神正與鳶魚是一般意思. 鳶魚之飛躍是氣也; 而其恁地處, 皆是道之體用也. 故以費隱言之. 今此鬼神之情狀, 皆亦莫非實理之所在; 而其不見不聞․體物如在者, 又族以發明費隱之妙. 今以是爲言, 又何疑乎?” (金元行, <中庸鬼神說>, <<美湖集>> 권14, 28b-29a) 


44) 송명흠(宋明欽): 1705(숙종 31)~1768(영조 4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이며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역천집(櫟泉集)>>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


45) “鬼神者, 陰陽之妙用而天地之實理也. 故以其造化之流行而言, 則功用良能皆當屬形而下; 以其實理之乘載而言, 則性情功效皆當屬形而上. 譬如人之心主氣而言, 則其爲性爲情亦氣之動靜也; 主理而言, 則或中或和, 皆理之體用也. 此所云鬼神之德者, 正指其實理而言, 與費隱章首君子之道語義恰同.” (宋明欽, <中庸箚錄>, <<櫪泉集>> 권12, 10ab)


46) “心者, 氣之精爽.” (朱熹, <<朱子語類>> 권5, 性理2)


47) “今不疑於彼而疑於此者, 一則以功用良能非所以釋理, 二則以不見不聞不足以爲隱: 此皆不明乎理氣渾融不離不雜之妙者也.” (宋明欽, <中庸箚錄>, <<櫪泉集>> 권12, 10b)


48) “審如是, 則神之格思, 亦理之格耶? 曰: 歸是實歸, 格是實格; 能格者氣也, 所格者理也. 有理則有氣, 氣行則理行, 此豈非渾融無間不離不雜之妙者孝?” (宋明欽, <中庸箚錄>, <<櫪泉集>> 권12, 11b)


49) 임성주(任聖周): 1711(숙종 37)~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이재(李縡)의 문인. 저서로 <<녹문집(鹿門集)>>이 있다.


50) “仲思又曰: 易辭及通書多以神爲理, 此言固若可喜, 余亦嘗欲如此看矣. 近復沈思, 覺有三疑. 夫章句旣以性情訓德, 今先就鬼神硬解作理, 則所謂鬼神之德猶曰理之性也: 一疑也. 章句其以不見不聞爲隱, 今以功用之自然處謂之不見不聞, 是以理之用爲隱也: 二疑也. 鬼神者, 本天地之妙用, 而今專謂之理, 則是理有作用, 不待於氣而氣反乘理以行也: 三疑也.” (宋明欽, <中庸箚錄>, <<櫪泉集>> 권12, 13ab )


51) “鬼神之義, 重在良能․靈處上. 陰陽固形而下者, 而鬼神則無形與聲. 不曰陰陽, 而曰鬼神者, 於此可見理氣混融無間之妙.” (李縡, <答任仲思問目>, <<陶庵集>> 권14, 26b)


52) “盖鬼神者, 二氣之良能․陰陽之靈處也. 故論其界分, 固當屬乎形而下者矣. 然所謂良能也․靈處也有實, 非有形象可見․聲臭可聞, 只是自然如此, 正朱子所謂與天地通者也. 故雖謂之理, 亦自無妨.”  (任聖周, <中庸>, <<鹿門集>> 권13, 36b)


53) “或曰: ‘此鬼神, 若是以理言之, 則朱子何不別立訓詁, 使人易曉, 而乃以良能靈處等說, 泛然說去乎?’ 曰: ‘良能․靈處, 乃鬼神之正義也. 雖曰以理言之, 豈於良能․靈處之外, 有別般鬼神乎? 故只一箇地頭耳. 自其能屈․能伸處言之, 則可屬乎氣; 自其自然恁地處[自然恁地亦朱子語]言之, 則可屬乎理. 其分盖不能以毫髮, 而皆不出乎良能․靈處之外也. [此正理氣混融無間之妙]’” (任聖周, <中庸>, <<鹿門集>> 권13, 37a)


54) “夫天地之間, 理與氣而已, 非理則便是氣, 非氣則便是理, 未有或理或氣兩占地步之物; 而獨鬼神, 謂之氣也亦可, 謂之理也亦可. 盖其至精․至微․至神․至妙, 初無定體, 亦無定名, 惟在所指之如何爾, 此正所謂混融無間之妙者也. 是故主乎氣而言, 則陰魄爲鬼, 陽魂爲神, 而鬼與神, 皆形而下者也; 主乎理而言, 則仁禮爲神, 義智爲鬼, [此言雖若可駭, 然細玩之, 則可以無疑. 只朱子所謂仁爲木神, 義爲金神者, 可見矣.] 而神與鬼, 皆形而上者也. (任聖周, <中庸>, <<鹿門集>> 권13, 38ab)


55) 전우(田愚): 1841(헌종 7)~1922.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간재집(艮齋集)>>․<<간재사고 (艮齋私稿)>>․<<추담별집(秋潭別集)>> 등이 있다.


56) “鬼神章是說道之費隱, 卽點點畵畵都是道理, 更無佗物. 然又要知得子思就氣上說理之意. 若不識此意, 直認鬼神之德爲理, 而不察夫理在氣上之妙, 亦甚疏脫.” (全愚, <中庸記疑>, <<艮齋集>> 後篇 권20, 23ab)


57) “鬼神旣是氣, 則德非直是理. 而先賢有指德爲理者, 此與指鳶魚之躍飛躍爲理同一. 氣上言理也.” (全愚, <中庸記疑>, <<艮齋集>> 後篇 권20,  24b-25a)


58) “以鬼神觀鬼神, 天地之功用․陰陽之良能, 何莫非鬼神? 以道觀鬼神, 天地之功用․陰陽之良能, 何莫非道? 然則天地․鬼神․鳶魚, 都是一貫道理.”  (全愚, <中庸記疑>, <<艮齋集>> 後篇 권20, 26ab)


59)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 38)~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


60) “程子曰: ‘鬼神天地之功用而造化之跡.’ ..... 跡也者, 步處之留痕也. 有巨人跡, 則知有巨人先過此處; 有小兒跡, 則知有小兒先過此處. 然跡則是步痕. 直以此跡爲巨人․小兒, 必無是理. 今以造化之跡, 謂之鬼神, 可乎? 天地者鬼神之功用, 造化者鬼神之留跡. 今直以跡與功用, 謂之鬼神, 可乎?”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0a-21a)


61) “張子曰: ‘鬼神者, 二氣之良能.’ ..... 二氣者, 陰陽也. 日影爲陰, 日光爲陽. 雖此二物, 往來隱映, 以爲晝夜, 以爲寒暑; 而其爲物, 至冥至頑, 無知無覺, 不及禽獸蟲豸之族遠矣. 安有良能, 主張造化,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乎?”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0a-21a)


62) “大宗伯之職, 掌建邦之天神․人鬼․地示之禮, 以佐王建保邦國.” (<<周禮>>, <春官宗伯 第三> )


63) “今案周禮, 太宗伯所祭鬼神, 厥有三品, 一曰天神, 二曰地示, 三曰人鬼. 天神者, 昊天上帝․日月星辰․司中․司命․風師․雨師, 是也. 地示者, 社稷․五祀․五嶽․山林․川澤, 是也. 人鬼者, 先王․先公․先妣之廟, 是也. 祭祀之秩, 雖有三品, 其實天神․人鬼而已. ..... 天以天神各司水火金木土穀山川林澤, 人主亦使人臣分掌是事. 及其後世, 乃以人臣之有功者, 配於天神, 以祭社稷, 以祭五祀, 以祭山川. 則名雖地示, 其實, 皆天神人鬼也.”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0ab)


64)  <<예기>> <제의>편에 기록된 것은 죽은 사람의 혼백과 제사에 대한 언급인데, 정약용이 그 글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논어>>에서 귀신에 대해 언급하기를 피한 공자가 <<예기>>에서는 그 태도를 바꿔 귀신을 자세히 설명한다는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기>>의 기록을 보고 인귀만이 귀신인 줄 알고, 천신이 있음을 모를까봐 염려한 것이다.


65) “案: 祭義是後人之所記, 其可信不如論語. 況其所論, 本是人鬼, 不是天神. 周禮, 天神․人鬼, 本自別言, 豈可渾之爲一類乎?”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1b)


66) “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則此祭郊祭也. 郊所祭者, 上帝也. 上帝之體, 無形無質, 與鬼神同德, 故曰鬼神也. 其感格臨照而言之, 故謂之鬼神.” (丁若鏞, <<中庸自箴>> 권1,  16a)


67)  丁若鏞, <中庸自箴> 권1,  5b-6a, 16a; <中庸講義> 권1,  22a 참조.


68) “인의예지란 본래 우리의 행위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마음속에 갖추어진 현묘한 이치가 아니다.” <“仁義禮智之名, 本起於吾人行事, 並非在心之玄理.”>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b)


69) “사람의 배태(胚胎)가 이루어지면 하늘은 거기에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를 부여한다. 그것의 됨됨이는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싫어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러워하니, 이것을 일컬어 성(性)이라고 하고 또한 성선(性善)이라 하는 것이다.” <“蓋人之胚胎旣成, 天則賦之以靈明無形之體. 而其爲物也, 樂善而惡惡, 胡德而耻汚, 斯之謂性也, 斯之謂性善也.”> (丁若鏞, <<中庸自箴>> 권1, 2b)


70)  “맹자는 성선(性善)의 이치를 논함에 기호로써 그것을 밝혔고, 孔子도 ‘항상된 도리를 붙잡아 덕을 좋아한다’는 싯구를 인용하여 인간의 성(性)을 증명하였다. 기호를 버려 두고 성을 말하는 것은 수사학(洙泗學)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孟子論性善之理, 輒以嗜好明之; 孔子引秉彛好德之詩, 以證人性. 舍嗜好而言性者, 非洙泗之舊也.”> (丁若鏞, <<中庸自箴>> 권1, 3a)


71) “인간의 성(性)은 도의(道義)와 기질(氣質) 두 가지를 합하여 하나의 성(性)으로 한 것이다. ..... 인간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있어 그것이 함께 발출한다.” <“人性者, 合道義․氣質二者, 而爲一性者也. ..... 人恒有二志相反而並發者.”> (丁若鏞, <<孟子要義>> 권2, 19a)


72) “本然之性을 논한다면, 인간에게 있어서는 道義와 氣質을 합하여 하나의 性으로 한 것이 本然이다.” <“至論本然之性, 人之合道義․氣質而爲一性者, 是本然也.”> (丁若鏞, <<孟子要義>> 권2, 19a)


73) “民之生也, 不能無慾. 循其慾而充之, 放辟邪侈, 無不爲已. 然民不敢顯然犯之者, 以戒愼也, 以恐懼也. 孰戒愼也? 上有官執法也. 孰恐懼也? 上有君能誅殛之也. 苟知其上無君長, 其誰不爲放辟奢侈者乎?” (丁若鏞, <<中庸自箴>> 권1, 4b)


74) “夫暗室欺心, 爲邪思妄念, 爲奸淫, 爲竊盜, 厥明日正其衣冠端坐, 修容粹然, 無瑕君子也. 官長莫之知, 君王莫之察. 終身行詐, 而不失當世之美名, 索性造惡而能受後世之宗仰者, 天下皆比比矣.” (丁若鏞, <<中庸自箴>> 권1, 4b-5a)


75) “暮行墟墓者不期恐而自恐, 知其有魅魈也. 夜行山林者, 不其懼而自懼, 知其有虎豹也. 君子處暗室之中, 戰戰栗栗,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 (丁若鏞, <<中庸自箴>> 권1, 5a)


76) “古人實心事天, 實心事神, 一動一靜一念之萌, 或誠或僞或善或惡, 戒之曰: 日監玆在, 故其戒愼恐懼愼獨之切眞切篤, 實以達天德. 今人以天爲理, 以鬼神爲功用․爲造化之跡․爲二氣之良能, 心之知之杳杳冥冥, 一似無知覺者. 然暗室欺心, 詐無忌憚. 終身學道而不可與入堯舜之域, 皆於鬼神之說, 有所不明故也.” (丁若鏞, <<中庸講義>> 권1, 21a)